신비 (조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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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초]](黃初) 원년([[220년]]), [[조비]](曹丕)가 황제에 오른 후 신비는 시중(侍中)으로 승진하고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ref name="s25"/> 당시 정월 개정 논쟁에서 위나라를 고대 [[순임금|순]](舜)과 [[우임금|우]](禹)의 계통으로 보고, [[하나라|하]](夏)의 정월로 위나라의 정월을 삼자고 주장했으며, 황제는 이를 수용했다.<ref name="s25"/> 황초 연간에 조비가 하북의 주민 10만 호<ref>[[경원 (위)|경원]](景元) 원년([[260년]])의 조위의 호구수가 약 66만이므로, 이는 조위 전체 호구의 1/7을 넘어서는 규모였다.</ref> 를 하남으로 옮기는 강제 이주안을 발표하였는데, 당시 메뚜기 때문에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었으므로 반대 의견이 많았으나, 조비가 간언을 불허하겠다는 기색을 보이자 다른 신하들이 간언하지 않은 것과 달리 신비는 정식으로 끈질기게 간언하였고, 결국 이주민을 반으로 줄였다.<ref name="s25"/> 조비가 사냥을 좋아하는 것에도, 아랫사람들에게 고통을 준다며 간언했고, 조비는 사냥 나가는 횟수를 줄였다.<ref name="s25"/>
 
황초 3년([[222년]]), 상군대장군(上軍大將軍) [[조진]](曹眞)의 군사로서 [[주연 (동오)|주연]](朱然)이 지키는 강릉성을 치는 싸움에 따라갔고, 돌아와서는 광평정후(廣平亭侯)가 되었다.<ref name="s25"/> 조비가 오나라를 정벌하려 하자 신비는 반대하였고, 조비는 듣지 않았으나 원정은 실패했다.<ref name="s25"/>
 
[[조예]](曹叡)가 황제가 되고서는 영향후(頴鄕侯)로 봉작이 올랐다.<ref name="s25"/> 중서감(中書監) [[유방 (조위)|유방]](劉放)과 중서령(中書令) [[손자 (조위)|손자]](孫資)가 정권을 쥐고 흔들어 대신들이 모두 그들과 교류하였으나, 신비는 그러하지 않았다.<ref name="s25"/> 아들 신창(辛敞)이 계속 그러다가는 유방과 손자에게 훼방을 받을 것이라고 간언했으나, 신비는 현 황제가 총명하지도 않지만 어리석지도 않으니, 그래봤자 삼공(三公)이 못 될 뿐이고 그것을 위해서 절개를 굽힐 수는 없다며 태도를 고치지 않았다.<ref name="s25"/> 용종복야(冗從僕射) [[필궤]](畢軌)가 상서복야(尙書僕射)를 왕사(王思)에서 신비로 바꾸도록 표를 올리자, 유방과 손자가 반대하여 신비는 외직으로 나가 위위(衛尉)가 되었다.<ref name="s25"/> 조예가 궁궐 등의 건축물을 짓는 것이 백성들을 피폐하게 한다며 강하게 간언했다.<ref name="s25"/> [[234년]], [[제갈량]](諸葛亮)의 5차 북벌 오장원전에서 대장군 [[사마의]](司馬懿)가 싸우기를 청하자, 조예는 허락하지 않았으나 사마의가 듣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신비를 대장군군사(大將軍軍師) · 사지절(使持節)로 삼아 제갈량과의 결전을 원하는 [[사마의]]를 신비가 허락하지 않았고, 사마의 등은 신비에게 감히 거역하지 않았다.<ref name="s25"/> 제갈량 사후 위위로 복직했다.<ref name="s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