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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국]]에서도 호남순무 [[양문정]]에게 명령을 철회하도록 청조에 상주하라고 요구하여 [[양문정]]도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고 청조에 이를 상주하였다. 그런데 [[양문정]]은 중앙으로부터 오히려 질책만 받았다. 이 소식이 전파되자 군중은 더욱 격분하여 [[보로운동]]이 확산되었다. [[호남 성]]에 이어 [[호북 성]]에서도 [[보로운동]]이 일어나 시위의 규모는 더욱 늘어갔다. '의창'(宜昌)에서 [[만현]](萬縣)까지 이미 [[철도]]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청조는 공사를 강제로 중지시켜 공사장의 노동자와 상인들이 모여 이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청조에서는 군대까지 동원하여 이를 강경진압하였다.<ref name="보로운동"/>
 
또한 [[무한]]에서도 [[보로운동]]이 일어낫는데, [[무한]]의 혁명당들도 긴밀히 연락하여 '대강보'(大江報)에 청조의 매국행위를 폭로하는 글을 연재하여 청조에 대하여 갖고 있는 기대와 환상을 버리도록 [[무한]]지역 군중들에게 호소했다. 그리하여 [[보로운동]]을 '반청운동'으로 결합시켜 [[혁명]]으로 이끌어 나가려고 하였다. 청조는 즉각 대강보를 폐간시키고 관련자들을 체포하였다. 이에 청조의 만행을 규탄하고 대강보를 지지하는 성원으ㅢ성원의 편지, 위문 전보, 항의문이 사옥의 벽마다 붙여져 [[무한]]의 보로운동은 뒤이어 [[무창봉기]]를 촉발시킨 도화선이 되었다.<ref name="보로운동"/>
 
[[양광]]지역은 당시 양광총독 [[장명기]]가 위압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나 [[광둥 성]]의 월한선 주식소유자가 만인대회를 개최하여 청조의 [[국유화]] 정책에 반대하였다. 해외의 [[화교]]들도 이 소식을 듣고 전보를 보내 보로 운동을 격려하였다. 이에 [[장명기]]는 주주들을 위협하고 또한 [[언론]]에 일체의 보로운동 소식을 게재하지 못하게 하여 이를 막으려 하였다.<ref name="보로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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