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라도 델 몬페라토 변경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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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라도는 이탈리아의 명문가였던 [[몬페라토 후작]](侯爵)가문 출신으로 [[피에몬테 주|피에몬테 지방]]에서 태어났다. [[1179년]] 몬페라토 후작가와 당시 [[비잔티움 제국]]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와 동맹을 맺은시기, 코라도는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제국의 내란을 진압했다. 코라도는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명장으로 알려져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나, 그 시기 비잔티움 제국의 내정은 매우 어지러워서 황제가 자주 바뀌었다.
[[1185년]]에 즉위한 황제 [[이사키우스 2세|이사키우스 앙겔루스]]가 특히 암우(暗愚)했기 때문에 제국의 내란은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1186년]] 겨울 이사키우스 2세 앙겔루스는 코라도에게 자신의 의누이 테오도라를 아내로 맞아들여달라고 요청하였고, 그때쯤 비잔티움 제국을 떠나 십자군에 참가하려고 생각하던 코라도도 이를
=== 티루스 방어전 ===
코라도는 이전부터 비잔티움 제국내의 반(反)라틴 감정을 답답하게 느끼고 있었고, 또 브라나스 일족에 의한 복수도 걱정이 되었다. 코라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1187년]] 7월 [[예루살렘 왕국]]으로 이동해 항구도시 [[티레]](티루스)의 수비을 맡게 되었다. 마침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
예루살렘 함락 후 그해 11월 티레는 예루살렘에서 온 난민들로 넘쳐났었는데, 살라딘은 다시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티레를 공격했다. 코라도는 성을 훌륭하게 수비하고, 약점이라 할 수 있는 해안선에서도 이집트 배에 의한 공격에 대항해 화공으로 격퇴하여 서전(緖戰)의 수주일간을 수비하는 데 성공했다. 장기전이 될 것이라 생각한 살라딘은 티레 공성전을 단념하고 다른 도시의 정복에 나섰으나, 이것은 코라도의 능력과 티레의 상륙거점으로서의 중요성을 가볍게 본 살라딘의 실패였다. 코라도는 예루살렘의 국왕 [[뤼지냥의 기|기 드 뤼지낭]]이 포로가 되면서, 영토도 티레 항구밖에 없게 된 예루살렘 왕국에 있어서 구심력을 높이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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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9년]] 기는 살라딘에 의해 해방되어 티레에 돌아와 코라도에게서 도시의 지배권을 빼앗으려 했으나, 코라도는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하틴 전투에서 패배한 기는 왕으로써의 자격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코라도는 기와 그의 아내로써 정식 왕위 계승자인 [[예루살렘의 시빌라]]의 입성을 거부하였으나, 기와는 [[아크레]]항에 대한 수년에 걸친 포위전에는 협력했다.
포위전 도중 1190년 시빌라와 그의 딸들이 병사하자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뤼지냥의 기 및 기타 귀족들과의 예루살렘 왕위 계승 다툼에 코라도도 뛰어들게 되었다. 다행히도 각지에서 아이유브 왕조군을 격퇴하여 용명을 떨친일, 자신의 가문의
=== 제3차 십자군 참가 및 죽음 ===
[[1189년]] [[제3차 십자군]]이 일어나자 코라도도 합류하여 티레항을 십자군의 상륙거점으로 제공하였다. 그때 제3차 십자군는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
십자군에 참가한 기사들은 동료사이면서 대립을 계속하던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보다는
그러나 코라도의 존재는 살라딘을 시작으로 이슬람측에 있어서 매우 위협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기 나 리처드 1세등 예루살렘 왕위을 둘러싼 적이 많았다. 코라도의 암살이 누군가의 의뢰로 이루어진 것인가는 지금까지도 알 수 없지만, [[1192년]] 4월 니자르파(암살교단의 별칭이다)는 코라도의 암살계획을 계획하고, 코라도는 예루살렘왕으로 즉위하기 직전에 니자르파의 자객에게 습격을 당해 암살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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