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연 (정치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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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후반 [[이승만]]이 영향을 발휘하던 [[독립운동]]단체 [[흥업구락부]]에서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서대문경찰서]]에 감금된 [[윤치영]]의 진술로 [[1938년]] [[5월 18일]]자 [[서대문경찰서]]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흥업구락부]]의 동지회원의 한사람으로 보고되었다.<ref>우남 이승만 연구 (정병준, 역사비평사, 2005) 365페이지</ref>
 
==== 태평양 전쟁 무렵 =====
그뒤 조선제사회사(朝鮮製絲會社)에 입사하여 감사역으로 활동하고, 자본금 30만원을 투자하여 조선흥업주식회사를 창업하였다. [[1941년]] [[12월]] 일제는 [[태평양 전쟁]] 발발 후 국내에서의 반일 인사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고, 조선어학회를 재정적으로 돕고 있었던 김도연도 조선어학회 사건(朝鮮語學會事件)에 관련자로 지목되어 1942년 12월 [[함경남도]] [[홍원]]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종로경찰서에 구속 수감되었다. 이후 20개월 동안 미결수로 함흥형무소(咸興刑務所)에서 보냈다. [[1945년]] 봄에 출감하였다.
[[1940년]] [[5월]] [[조선총독부]]가 [[창씨개명]]을 강요했으나 그는 거절하고 응하지 않았다. 그는 총독부의 감시 대상인 [[불령선인]] 2호로 선정되었다.
 
그뒤 조선제사회사(朝鮮製絲會社)에 입사하여 감사역으로 활동하고, 자본금 30만원을 투자하여 조선흥업주식회사를 창업하였다. [[1941년]] [[12월]] 일제는 [[태평양 전쟁]] 발발 후 국내에서의 반일 인사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고, 조선어학회를 재정적으로 돕고 있었던 김도연도 조선어학회 사건(朝鮮語學會事件)에 관련자로 지목되어 1942년 12월 [[함경남도]] [[홍원]]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종로경찰서에 구속 수감되었다수감되었다가 함흥으로 이감되었다. 이후 20개월 동안 미결수로 함흥형무소(咸興刑務所)에서 보냈다. [[1945년]] 봄에 출감하였다.
 
=== 정치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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