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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 활동과 독립운동 ====
김준연은 한국 최초의 해외 특파원([[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1925년]]의 [[소비에트 연방|소련]]을 시찰했고 조선일보 논설위원, 전 [[조선공산당]] 당수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1926년]]부터 민족주의자의 통합단체인 [[신간회]]에 참여하였고, [[1927년]]에는 [[고려대학교|보성전문학교]]의 강사로서 교단에도 섰다. [[1927년]] 《[[현대평론]]》이 창간되자 그 창간호에 [[이관용]](李冠鎔)·[[안재홍]]·[[이순탁]](李順鐸)·[[백남운]](白南雲)·[[홍명희]]·[[이긍종]]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ref>1927년 ~: [http://people.aks.ac.kr/front/dirservice/dirFrameSet.jsp?pUrl=/front/dirservice/ppl/viewDocumentPpl.jsp?pLevel2Name=&pLevel3Name=&pAgeCode=&pAgeName=&pGanadaFrom=&pRecordID=PPL_7HIL_A1897_1_0009167&pPplCount=&pOrderByType=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1928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할 때 제3차공산당사건(세칭 ML당사건)에 관련되어 7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출감 후 [[1934년]] 동아일보에서 주필을 지냈다. [[1936년]] [[손기정]](孫基禎)의 일장기말살사건에 관련되어 사임한 뒤, 광복 때까지 경기도 전곡에서 해동농장(海東農場)을 관리하였다. 또한 흥업구락부사건, [[조선어 학회]] 사건 등을 주동하여 국내에서는 가장 격렬한 항일투쟁을 벌였고, 8년의 투옥 생활과 9년 동안의 연금생활을 하였다. 일제 시대 당시 [[김창숙]]과 함께 항일 세력의 양대 산맥이었으며 일제가 가장 경계하고 감시하는 0순위 인물이었다. 이 일화가 입증하듯 낭산은 국민들로부터 인기와 신망을 한몸에 받는 인물이며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후 반민법 처리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ref name="mon0306">{{뉴스 인용|제목=반민특위에 스며든 부적격자들, 친일파 청산 좌절의 한 원인 |url=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54 |출판사=[[월간민족21]]|저자=김지형 기자|작성일자=2003-06-23|확인일자=2010-08-09}}</ref>
 
==== 일제 강점기 후반 ====
또한 흥업구락부사건, [[조선어 학회]] 사건 등을 주동하여 국내에서는 가장 격렬한 항일투쟁을 벌였고, 8년의 투옥 생활과 9년 동안의 연금생활을 하였다.<ref name="mon0306"/> 일제 시대 당시 [[김창숙]]과 함께 항일 세력의 양대 산맥이었으며 일제가 가장 경계하고 감시하는 0순위 인물이었다. 이 일화가 입증하듯 낭산은 국민들로부터 인기와 신망을 한몸에 받는 인물이며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후 반민법 처리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ref name="mon0306"/>
 
[[1940년]] 창씨개명이 떨어지자 그는 거절하였고, 계속 농장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1942년]] 이후 [[이승만]]이 출연하는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여러 번 비밀리에 청취하기도 하였다.
 
=== 광복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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