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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는 경쟁 이라는 개념을 조선에 최초로 소개하였다.‘경쟁’이라는 일본에서 만든 번역어를 ‘경쟁론’이라는 글을 통해서 1883년에 최초로 조선에 도입한 사람은 유길준이었다.<ref name="yud1"/> 그 뒤 그는 [[어윤중]]과 함께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할 것을 건의하였다. 후일 [[박노자]]는 박정희의 외자 도입에 의한 경제 개발 프로젝트를 마치 예견하듯이 경제 발전을 위한 일본의 대규모 차관을 들이려고 한 사람들도 바로 어윤중·유길준 등의 ‘실무 개화파’였다며 부정적으로 평하였다.<ref name="yud1"/> 그러나 유길준과 어윤중의 일본 차관 도입 주장은 고종에 의해 거부되면서 실패한다.
 
[[파일:1883년조선주미보빙사절단01.jpg|thumb|180px|left|[[1883년]] [[9월]] [[미국]]에 파견된 [[조선]]의 보빙사절단원(뒷줄 가운데가 유길준), 앞줄 왼쪽 첫번째와 두번째는 [[홍영식]], [[민영익]]]]
 
외무 낭관을 사퇴한 뒤 유길준도 사절단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이 사절단은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하고 유길준은 [[홍영식]], [[서광범]], [[고영철]], [[변수]], [[현흥택]]·[[최경석]] 등과 함께 사절단에 임명되어 [[1883년]] [[7월]] 인천항을 출발하였다. 보빙사 일행은 같은해 [[9월 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상륙, 기차편으로 뉴욕에 도착하여 사절단은 40여일 간 미국에 체류하며 [[미국]] 대통령을 면담하고 각 기관을 두루 시찰한 후 귀국했다.<ref name=autogenerated1>[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854588 JOINS | 아시아 첫 인터넷 신문<!-- 봇이 붙인 제목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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