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길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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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을사조약 체결을 반대하였다. 지일파(知日派)였지만 그는 을사조약에 반발했는데,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ref>이 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할 수 있었고, 그는 이 점을 우려했다.</ref> 그러나 그의 바램과는 달리 [[을사늑약]]은 강제로 체결되었다. [[을사조약]]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이 [[일본]]의 [[한국]] 침략을 묵인하는 대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점령을 눈감아주기로 한 조약문을 입수하면서 미국을 의심하게 된다.
 
1905년 11월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됨에 따라 오래 전부터 동지들과 손을 잡고 국권을 확립하고 근대국가의 체제를 갖추어보려던 것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마음을 가다듬기 힘들어 [[기독교]] 신앙에 귀의했다. 그가 기독교로 귀의하는 데에는 오랜 친구인 [[윤치호]]의 도움도 작용하였다. 또 이 시기에 본국으로부터 김정식(金貞植)이라는 사람이 도쿄 기독교청년회(YMCA)의 총무로 부임하여 유길준에게 기독교를 믿도록 설득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식은 유길준의 동생 유성준(兪星濬)과 같이 서울의 종로감옥에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1907년]] [[대한제국 순종|순종]] 황제의 특사로 귀국했다. 그후 [[흥사단]]에 참여하여 활동했고 [[국민경제회]]를 설립했으며 [[계산학교]](桂山學校)를 설립했다. 또한 융희학교 설립 준비작업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07년 6월 한국이 일제 침략상과 을사조약의 무효를 세계 열강에 호소하려다 실패한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내정에 관한 전권을 장악하려고 했다.<ref name="daum2">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24h3009a</ref> 이에 헤이그 밀사사건의 책임을 고종에게 묻고 고종을 강제퇴위시키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외상 하야시 다다스[林董]와 한국의 국권을 빼앗는 내용의 신협약을 작성하여 1907년 7월 24일 정식으로 한국정부에 제출했다.<ref name="daum2"/> 그러자 이완용 내각은 하루 만에 찬성하여 순종의 재가를 얻었다.<ref name="daum2"/> 이완용 내각의 각료들과 대신들은 정미7조약의 체결에 적극 찬성했다. 그러나 그는 정미7조약의 체결을 완강히 반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