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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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민영익은 1860년 민태호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7대조 민유중의 딸이 숙종 계비로 책봉되면서 중앙 정계의 핵심 세력으로 떠올랐지만, 고조부가 예조판서를 지낸 이후로는 권력에서 점차 소외되었다. 민영익이 태어났을 때, 민태호는 동생 집에 얹혀살면서 콩죽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처지였다.<ref name="jy200905">[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609789 민영익 등 보빙사 큰절로 禮 갖춰] 중앙일보 2009.05.16일자</ref> [[흥선대원군]]의 본부인인 여흥부대부인이 있었으나 그녀는 민태호, 민규호와 촌수가 멀었고, 대원군 역시 척신을 미워하여 별 혜택을 볼수 없었다.
 
결국 민태호의 부친, 즉 민영익의 조부의 초상 때 관을 살 돈이 없어 시신을 짚자리로 말아 출상했을 정도로 가난했다. 간구했던 민영익의 집안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그가 7세 되던 해인 1866년 민치록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면서부터였다.<ref name="jy200905"/> 민영익은 민비 책봉 이전 몇 안 되는 과거 합격자였던 그의 숙부 민규호는 일약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고, 1870년 그의 부친도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올라 승승장구했다.<ref name="jy200905"/>
 
유년기를 몰락한 양반집안의 후예로 보냈던 민영익도 10대에 접어들면서 권문세가의 후예로 신분이 상승했다. [[1874년]] 민비의 오빠 민승호가 집으로 배달된 의문의 소포가 폭발해 사망했다. 비록 양자였지만 민승호는 민치구의 아들로 태어나 민치록에게 입양된 [[명성황후]]의 유일한 혈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