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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오성륜'''(吳成崙,1898년-1947년)은 조선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이다. ==독립운동== ===의열단 활동=== 무정부주의 독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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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로 건너가 동방노동자공산주의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23년]]에는 [[고려공산당]]의 집행부대 성격을 가진 [[적기단]]에 가담했으며, 이듬해에는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간의 좌우합작으로 운영되던 황포군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1927년]] 중국공산당의 [[광저우]]점령사건인 광둥코뮌 가담으로 [[광둥성]]의 해륙풍 소비에트로 활동지역을 옮겼다. 이듬해 해륙풍 소비에트가 붕괴되면서 1929년에서 1930년 사이에 만주의 길림성 반석현에서 활동했다.이는 중국 공산당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조선사람인 오성륜의 중국 공산당에서의 활동은 [[1930년]] [[코민테른]]에서 중국공산당은 만주내 한인 [[공산주의]] 단체들을 흡수하라고 지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시대상황 때문이었다.
 
[[1931년]] 오성륜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반석현위의 무장조직인 적위대(赤衛隊)를 결성하였는데, 후에 [[동북항일연군]]의 모태가 되었다. 이때 그와 만주성위의 서기 나등현은 일본을 적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보았으나, 중국 공산당에서 이를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중국인 지주들을 상대로 [[계급투쟁계급혁명]]을 벌였다. 하지만 지주들의 저항으로 계급투쟁은계급혁명은 실패했고, 오성륜은 적위대를 노농반일의용군으로 개칭했다. 또한 일제에 대항하는 비적인 상점대와 연합했으나,내부에서 항의가 있어서 조직이 분열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만주성위에서는 중국인인 양정우를 대표로 파견, 지도기관 개조를 시작한다.(1932년 11월). 양정우는 의용군과 상점대의 분리를 항일운동 지속을 위해 거부하는 오성륜을 반석현 당대회에서 비판과 함께 반석현위 서기직에서 해임시켰다.
 
중국공산당에서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로서의 뜻을 펼칠 수 없게 되자, 그는 [[1934년]] [[11월 7일]]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의 1군의 제 2사제2사 정치부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독북인민혁명군은 [[남만주]]의 공산주의계 무장단체를 통합한 연합무장단체이다. [[1935년]] 코민테른에서 계급혁명노선에서 반제국주의 인민전선전술로 활동방향을 바꾸면서 재만한인조국광복회를 [[1936년]] 6월에 결성한다. 또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군수처장으로 승진하였으나, 동북항일연군은 일본의 겨울진압전과 집단수용시설인 집단부락 건설로 인한 민중들의 지원단절로 세력이 약해졌으며 오성륜 자신도 포위당한다. 결국 1941년 1월 항복하였으며 일본에 협력하고 말았다. 그래서 일본이 패망한후 [[팔로군]]에게 처형당한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1947년]] 내몽골 자치주에서 병사하였으며, 그의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로서의 업적은 김일성의 업적으로 둔갑하였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