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훈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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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쪽으로의 귀환길 ===
그런데 먼 지방에서 주둔한 지 3년이 지났는데도 교체 명령은 없었고, 드디어 6년째가 되어 버렸다. 이때까지 6년 동안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자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귀향을 탄원했지만, 이를 각하당하고 다시 1년을 더 주둔할 것을 명령을 받았다명령받았다. 교병들은 자신들이 고향에 돌아갈 가망이 없어지자 이 사태에 격분하기에 이르렀고, 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마침내 교병들은 도적 출신의 전직 무녕군 [[장교]]였던 도우후(都虞侯, [[황제]]의금군(禁軍)이나 번진 절도사의 [[친위대|친위군]] [[대장]]이나 번진의 절도사 휘하에서내에서 군법의 집행을 담당하는 [[친위대]] 상급 [[장교]]) 허길(許佶) 등의 주도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행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868년]] [[음력 7월|7월]], 계주의 관찰사가 인근 지방으로 전근을 가면서 후임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기를 노린 교병들은 계주도장(桂州都將) 왕중보(王仲甫)를 살해하고 식량창고를 강도 높게 약탈하였다. 그들은 양료판관(糧料判官, 식량과 사료와 관련된 사무를 감독하는 관리) [[방훈]]을 자신들의 우두머리로 추대하여 서주로의 귀환을 개시한 것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이것이 방훈의 난의 시작으로 되어 있다.
 
그들은 비록 모반을 일으켰지만, 3년 교체를 언급해 두면서 6년으로 주둔 기간을 연장한 조정 측에서도 꺼림칙한 입장을 보였기 때문에 토벌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들은 호남도(湖南道, 현 [[후난 성]] 일대)를 지나 장강을 따라 악악도(鄂岳道, 본거지는 현 [[후베이 성]] [[우한남동부 시]]일대)・선흡도(宣歙道, 현 [[안후이 성]] 남부 일대)・절서도(浙西道, 현 [[저장 성]] 북부 일대) 등을 거쳐 동쪽으로 북상하여 회남도(淮南道, 현 [[안후이 성]] 중부 일대)에 이르렀다. 그들은 통과 지점의 [[주 (행정 구역)|주]]와 [[현 (행정 구역)|현]]에서 환대를 받으면서 서주로 향했다. 이때 원래 그들의 동료로 그때는 이미 도적이 되어 있었던 교병들이 합류하면서 어느새 1천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당시 서주는 서사관찰사서사도 관찰사(徐泗觀察使)의 관하에 있었고, 이때의 그 서사관찰사는서사도 관찰사는 최언증(崔彦曾)이었다. 교병들과 관찰사 사이에서 사자의 왕래가 있어서 조정으로서는 일단은 허락할 방침이었지만, 일각에서는 제멋대로 난폭한 행위를 일삼아 온 무리들을 받아들여도 좋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의 주장이 제기되었고, 또한 그 주장이 조정 내부에서 주된 기류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교병 측도 조정을 신용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러한 의심의 망상에 의한 공포 속에서 방훈에게는 하나의 야망이 발동하고 있었다. 방훈은 다음과 같이 부하들을 선동하였다.
 
{{인용문|조정에서는 "우리를 [[능지처참]]하고 일족들을 모두 주살하려고 한다. 어차피 죽는다면 (관군과) 싸워서 죽는 것이 낫다. 한번 더 부귀영화를 얻어서 옛날처럼 마음 편한 생활을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이로서 서주의 교병들은 마침내 반역을 개시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