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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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사건에는 처음 봉기 이외에도 진압대에 의한 유혈사태, 공산 무장대에 의한 유혈사태가 모두 포함됩니다.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3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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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pril 3rd accident memorial of Jeju.JPG|thumb|right|제주 4·3 평화 기념관]]
'''제주 4·3 사건'''({{lang|ko-hani|濟州 4·3 事件}})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제주도에서 5.10선거를 반대한다는 명분 하에 [[남조선로동당]]에 의해 시작된 무장봉기와 이후 무장대와 진압군 등에 의해 발생한 유혈사태이다. 남조선로동당 제주당위원회 조직부장 겸 군사부장, 인민해방군 사령관 [[김달삼]] 주도로 군침투조직인 국방경비대 제11연대 문길상 중위 등이 무장봉기를 계획하여, 1948년 4월 3일 새벽2시 제주전역에서 350여명의 무장대를 포함한 1,500여명이 동원되어 12개 경찰지서 및 우익인사들에 대한 살인, 테러, 방화 등을 일삼았다. 제주 4·3 사건은 8·15광복 이후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5·10 총선]] 방해하기반대하기 위해 시작되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제주 전역에 행정기능이 마비되는 등 심각한 치안교란상태가 지속되었다. 이 제주 4·3사건은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인적피해를 보면,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조사결과 사망자만 14.000여명(진압군에 의한 희생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1,764명 및 기타)에 달한다. 특히 진압작전 중 사망한 군인은 180여명, 사망 경찰관은 140여명이다. <ref>[http://www.newdaily.co.kr/html/article/2010/08/12/ARTnhn54065.html 해방공간/남북 공산당, 전국서 테러 폭동 양민 학살
]뉴데일리</ref><ref>《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작성</ref><ref>[http://www.jeju43.go.kr/sub/catalog.php?CatNo=26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누리집]</ref>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대한 특별법에서는 "제주4·3사건 이라 함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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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과 ===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은 김달삼 등 500여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ref>[http://wwwcontents.independentarchives.cogo.kr/newsnext/articlecontent/listSubjectDescription.htmldo?noid=39796003321 현대사 왜곡 실태 -국가기록원 제주4.·3사건]독립신문</ref> 한라산 정상과 주요 고지에 일제히 봉화를 올리고 인공기를 앞세우고 ‘적기가’와 ‘인민항쟁가’를 부르면서 경찰지소 12개소를 비롯한 수많은 관공서 건물을 불태우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였다. 이들은 경찰관과 우익인 서북청년단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 회원 등과 그 가족들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6년 6개월간 지속되면서 엄청난 유혈사태가 되었다. <ref>[http://www.freezonenews.com/news/article.html?no=23624 제주4·3사건, 반국가적 무장폭동 프리존뉴스 ]</ref> .
[http://www.freezonenews.com/news/article.html?no=23624 제주4·3사건, 반국가적 무장폭동 프리존뉴스 ] </ref> 이후 9연대 사단장 중령 김익렬과 김달삼의 평화협상이 체결되어 전투를 72시간 이내에 중단하기로 합의하였다.<ref>[http://www.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57584 4시간 담판 끝 전투중지 합의 제민일보] </ref> <ref>[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3321 국가기록원 제주4·3사건</ref>
미군정은 이어 [[5월 5일]]에 '제주도 비상경비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이어서 미군정은 즉각 각 도로부터 차출한 대규모의 군대,경찰, 서북청년단등 반공단체를 증파하였다. 제주도 민중들은 미군정,군경,반공단체의 탄압때문에 [[한라산]]으로 들어가 항쟁하였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북청년단]]등 극우 반공청년단체의 탄압에 대한 반감과 저항, 남한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와 조국의 통일독립, 반미구국투쟁을 무장 항쟁의 기치로 내세웠다. <ref>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2003) 162~168쪽.</ref>
 
그러나 [[5월 1일]] 오라리에서 일어난 방화 사건으로 합의가 파기되면서 사태가 악화되어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6년 6개월간 지속되면서 엄청난 유혈사태가 되었다.
미군정은 이어 [[5월 5일]]에 '제주도 비상경비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이어서 미군정은 즉각 각 도로부터 차출한 대규모의 군대, 경찰, 서북청년단등 반공단체를 증파하였다. 제주도 민중들은 미군정,군경,반공단체의 탄압때문에 [[한라산]]으로 들어가 항쟁하였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북청년단]]등 극우 반공청년단체의 탄압에 대한 반감과 저항, 남한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와 조국의 통일독립, 반미구국투쟁을 무장 항쟁의 기치로 내세웠다. <ref>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2003) 162~168쪽.</ref>
[[5월 10일]]의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남한 단독선거]]에서 제주도는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되었고, 다음달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려는 미군정의 시도도 수포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5월 20일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하여 무장대에 가담하였고, [[6월 18일]] 경비대 연대장이 부하 대원에게 암살당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이후 잠시 소강 상태에 놓였으나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다음달 9일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문제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그해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증파하였고,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앞서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되었고, 중산간마을에 대대적 진압작전이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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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동안 제주4.3사건에 대해 ‘미제침략자들이 날조한 5.10망국단독선거를 반대해 1948년 4월3일 제주도 인민들이 일으킨 반미구국항쟁'으로 규정해왔다. 북한 관영 로동신문은 최근 ‘반미항쟁으로 부르는 제주도의 원한’이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우리 민족이 불굴의 기상과 자주정신, 조국통일의지를 남김없이 과시한 제주도 4.3 인민봉기는 지금도 우리 겨레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다”고 평가했다.<ref>[http://www.freezonenews.com/news/article.html?no=23624 제주4·3사건, 反국가적 무장폭동]프리존뉴스</ref>
 
== 계엄령의 적법성 논란 ==
[[1948년]] [[11월 17일]] 발효된 계엄령이 적법한 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위법하다고 보는 측에서는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에 계엄령을 발효한 것은 법률에 의해 정하는 바에 의해 계엄을 선포하도록 되어있는 제헌 헌법에 어긋난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를 적법하다고 보는 측에서는 일제 강점기당시의 계엄법이 효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적법하다고 주장한다.
<ref>[http://www.jeju43.go.kr/sub/catalog.php?CatNo=27]</ref>
== 함께 보기 ==
* [[제주 3·1절 발포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