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형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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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테일의 많은 3차원적 작품들에서, 수평선과 수직선은 서로 엇갈리는 층이나 평면에 위치하는데, 이리하여 각각의 요소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다른 요소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도록 할 수 있다. 이 특징은 [[헤리트 리트펠트]]의 [[슈뢰더 주택]]이나 [[적청 의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더 스테일 운동은 [[입체파]] 회화와 신비주의, [[수학자]] [[스쿤마커스스훈마케르스]](M.H.J. Schoenmaekers)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에서 온 "이상적인" 기하학적 형태(예를 들어 "완벽한 곧은 선")에 대한 개념에서 영향을 받았다. 더 스테일의 작품들은 건축의 [[바우하우스]] 양식과 [[국제주의 양식 (건축)|국제주의 양식]], 의복과 인테리어 [[디자인]] 등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ism"(또는 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와 같은.)의 일반적인 기준을 따르지 않으며, 바우하우스와 같은 예술학교의 원칙에 충실한 것도 아니다. 다만 이것은 집합적인 프로젝트며, 공동의 기획이다.
 
[[음악]]에서는 더 스테일은 작곡가인 몬드리안의 가까운 친구인 Jakob van Domselaer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1913년에서 1916년 사이 그는 ''Proeven van Stijlkunst''(예술 양식적인 실험들)을 작곡하는데, 이는 주로 몬드리안의 회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이 미니멀리즘적이면서도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음악은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음악적 요소를 정의하고 두 원칙들의 조화를 이루려 했다. van Domselaer는 그가 살아있을 때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았고, 더 스테일 그룹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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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스테일"의 창시===
[[1915년]]경, 판 두스뷔르흐는 결국은 "더 스테일" 잡지의 창안자가 될 예술가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 [[암스테르담]] [[스테델레이크 박물관]](Stedelijk museum, 시립 박물관)에서 [[피트 몬드리안]]을 만났다. 몬드리안은 [[1912년]] 파리로 이주했는데(그리고 여기서 자신의 이름을 "Mondriaan"에서 "Mondrian"으로 바꾼다.), 마침 네덜란드를 방문했을때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파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라렌]](Laren)에 있는 예술가 공동체에 머물렀는데, 여기서 그는 [[바르트 판 데르 레크]]와 [[스쿤마커스스훈마케르스]](M.H.J. Schoenmaekers)를 만나게 된다. 1915년 스쿤마커스는스훈마케르스는 《세계의 새로운 이미지 (Het nieuwe wereldbeeld)》를 출판하고, 뒤이어 [[1916년]] 《조형수학의 원리 (Principles of Plastic Mathematics)》를 출판한다. 이 두개의 저작은 몬드리안과 다른 더 스테일의 구성원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판 두스뷔르흐는 [[야코뷔스 아우트]]와 헝가리 예술가인 [[빌모스 후사르]]도 알고 있었다. 1917년 이 예술가들의 모임은 시인인 [[안토니 콕]](Anthony Kok)과 함께 더 스테일을 창립한다. 젊은 건축가인 [[헤리트 리트펠트]]는 [[1918년]]에 이 모임에 가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