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011년 코트디부아르 위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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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파일:LocationCotedIvoire.svg|thumb|코트디부아르의 위치]]
[[파일:Cote d'Ivoire guerre civile mai 2005.png|thumb|코트디부아르 반군와타라군 점령 지역]]
[[파일:IC Gbagbo Motta eng 195.jpg|thumb|[[로랑 그바그보]] ]]
[[파일:Alassane Ouattara.jpg|thumb|[[알라산 우아타라와타라]] ]]
코트디부아르는 전세계 [[카카오]]의 40%를 생산하는 곳이다.<ref name="한겨레21_28857">[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8657.html 초콜릿보다 검은 코트디부아르의 미래] 한겨레21</ref> 오랫동안 [[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 상태를 겪던 코트디부아르는 1960년 8월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다.<ref>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지리/세계의 여러 나라/아프리카/시에라리온·코트디부아르·라이베리아#코트디부아르|코트디부아르]]〉</ref> 독립 후 카카오, [[커피]] 등 열대작물을 수출하며 성장하였으나 1993년 33년간 재임하였던 초대 대통령 [[펠릭스 우푸에부아니]]가 사망한 후 [[쿠데타]]에 시달렸다. 2000년 시민들의 시위로 군부 정권을 몰아냈으나 북부와 남부 간의 인종 문제가 불거져 왔다.코트디부아르의 북부는 [[사바나]] [[기후]]로 척박하며 [[무슬림]]이 주를 이루는 반면, 남부 해안 지역은 [[열대 우림]]으로 [[플렌테이션]] 농업이 발달해 있는데, 북부와 이웃 나라의 주민들이 남부로 몰려들게 되면서 인종 갈등이 일어났고 결국 2002년 무력 충돌을 겪기도 하였다.<ref name="한겨레21_28857"/>
 
2000년 군사 정권이 붕괴한 후 [[코트디부아르의 대통령]]에 취임한 [[로랑 그바그보]]는 2005년 임기가 완료되었으나 반군과의 전쟁, 공명한 투표를 위한 준비 부족 등을 내세워 투표를 연기해왔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9/10/29/0200000000AKR20091029217000099.HTML?did=1179m 코트디부아르 대선 또 연기될 듯], 연합뉴스</ref> 2010년 11월 28일 선거가 치뤄 졌으나 선거관리위원회와 헌법재판소가 각기 다른 유권해석을 내리면서 [[알라산 우아타라와타라]]와 로랑 그바그보가 둘다 차기 대통령임을 주장하며 취임식을 갖는 사태가 발생하였다.<ref name="한겨레454522">[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rabafrica/454522.html ‘대선갈등’ 코트디부아르 유혈사태], 한겨레신문</ref> 유수프 바카요코 코트디부아르 선관위원장은 공화당의 와타라 후보가 54.1%의 표를 얻어 45.9% 득표에 그친 그바그보 대통령을 제치고 대선에 승리했다고 12월 2일 잠정 개표 결과를 밝혔다. 그러나 헌법상 개표 결과 발표 시한인 1일을 하루 넘긴 이날 선관위의 잠정 개표 결과를 코트디부아르 헌법위원회는 '불법'으로 규정했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0/12/03/0200000000AKR20101203042200009.HTML?did=1179m 코트디부아르 대선 野후보 승리..정국 격랑(종합)], 연합뉴스</ref>12월 3일 헌법위원회는 선관위 발표를 뒤집고 그바그보의 당선을 선포하였다.<ref name="한겨레454522"/>
 
대선에서 승리한 와타라 전 총리는 부르키나파소 이민자의 아들로 이민자와 무슬림 인구가 많은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현 대통령 그바그보는 기독교 인구가 많은 남부를 중심으로 코트디부아르 순혈주의를 강조하고 있다.<ref name="서울신문20101231016023">[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1231016023 코트디부아르 ‘남북분단’… 사실상 내전 상태로], 서울신문</ref>
 
2010년 12월 4일 알라산 우아타라와와타라와 로랑 그바그보는 각각 대통령 취임식을 가졌고 이로서 대통령이 동시에 둘이 존재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다.<ref>[http://www.segye.com/Articles/NEWS/INTERNATIONAL/Article.asp?aid=20101205002254&subctg1=&subctg2= 코트디부아르 두 대통령 동시 취임], 세계일보</ref> 선거 인증을 담당하고 있던 [[최영진]] 유엔 코트디부아르 특별대표가 와타라 전 총리의 대선 승리를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그바그보 측은 유엔 관리가 대통령을 지명하는 것은 졸렬한 짓이라고 주장하고, 이런 식으로 나오면 코트디부아르를 떠나라고 요구할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0/12/04/0200000000AKR20101204042700009.HTML?did=1179m 국제사회, 코트디부아르에 대선 승복 촉구], 연합뉴스, 2010/12/04</ref> 2010년 12월 16일 [[아비장]]에서 양 측을 지지하는 충돌이 일어나 일부 지역에서는 총격전으로 발전하였다.<ref name="한겨레454522"/>
 
국제 연합은 와타라의 승리를 인정하고 있으며 그바그보의 선거 승복을 요구하고 있다. 최영진 유엔 코트디부아르 대표는 유엔에 선거 인증을 요청하고, 그 결과가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배격하는 것은 유엔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1/01/0200000000AKR20110101054000099.HTML?did=1179m 인터뷰-최영진 유엔 코트디부아르 대표], 연합뉴스, 2011/01/02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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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말이 되자 급격히 늘어났던 사망자가 줄어들면서 유혈 사태는 진정국면으로 들어서는 것처럼 보였다.<ref>[http://news.mk.co.kr/v3/view.php?year=2010&no=731666 UN "코트디부아르 유혈 충돌, 진정 국면"], 뉴시스</ref> 한편, [[나이지리아]], [[가나]], [[감비아]] 등 16개 국가로 이뤄진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 국가들은 그바그보 대통령의 퇴진 거부에 따라 30일 나이지리아 수도 [[아부자]]에서 무력 개입 방안을 협의했다.<ref name="서울신문20101231016023"/> 국제 연합은 2011년 1월 2일 성명을 내고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와타라 대통령"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재확인했다고 밝혔다.<ref>[http://news.mk.co.kr/v3/view.php?year=2011&no=1868 코트디부아르 사태, 다음주 초 `고비`], mk뉴스</ref>
 
국제 연합 [[안전보장이사회]]는 2011년 1월 19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이사회에서 코트디부아르 주둔 유엔평화유지군을 2000명 증원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체택했다. 결의안에 따르면 안보리는 올 3월부터 6월까지 단계적으로 코트디부아르의 경찰 및 군 병력을 500명씩 충원하게 된다. 결의문 체택은채택은 러시아의 미온적 태도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었으나 코트디부아르 내에서 협상을 진행하던 라일라 오딩가 [[케냐]] 총리가 그바그보 설득에 실패하면서 러시아의 입장을 바꿔 체택이채택이 이뤄졌다. 또한 이날 [[스위스]] 연방정부는 지난 1월 14일 반정부 시위로 축출된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튀니지]] 전 대통령과 함께 그바그보 대통령의 자국 내 자산 동결을 발표했다. <ref>[http://media.daum.net/foreign/others/view.html?cateid=1046&newsid=20110120141122508&p=munhwa 유엔 평화유지군 2000명 코트디부아르 추가 파병], 문화일보</ref> 같은날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는 그바그보와의 협상 결렬을 확인하고 군사개입원칙을 발표하였다.<ref>[http://media.daum.net/foreign/others/view.html?cateid=1046&newsid=20110119141121658&p=munhwa 코트디부아르에 병력 투입],문화일보</ref>
 
이후에도 사망자가 계속 발생하여 유혈사태 이후 2011년 1월 26일까지 최소 260명이 숨졌으며, 2만9천여명이 유혈 사태를 피해 [[라이베리아]]로 피난했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1/26/0200000000AKR20110126015300009.HTML?did=1179m 아프리카연합 의장 코트디부아르 두 대통령 면담], 연합뉴스</ref> 또한 그바그보와 와라타는 재정 통제권을 놓고도 충돌하여, 1월 26일 로랑 그바그보 정부는 서아프리카 중앙은행 코트디부아르 지점이 세네갈에 있는 은행 본부가 아니라 그바그보 정부의 지시를 따르도록 명령했다. 반면에,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는 그바그보의 퇴진을 유도하기 위해 국제사회에서 합법적 당선인으로 인정받은 알라산 우아타라와타라 대통령이 지명한 인사만 중앙은행의 자금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코트디부아르는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의 다른 7개국과 함께 서아프리카 중앙은행의 화폐인 프랑 세파를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1/27/0200000000AKR20110127003600009.HTML?did=1179m 코트디부아르 두 대통령 중앙은행 인출권 힘겨루기], 연합뉴스</ref>
 
2011년 2월 21일 아비장에는 사태 중재를 위해 [[모하메드 울드 압델 아지즈]] [[모리타니]] 대통령, [[제이콥 주마]]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등 아프리카 대통령 4명이 도착하여 양측과 면담하였으나, 그 사이에도 로랑 그바그보를 추종하는 정부군이 수도 아비장 내 친야당 세력 구역에 공격을 가해 최소 6명이 숨졌다.<ref>[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10222_0007482301&cID=10103&pID=10100 코트디부아르 그바그보 추종軍 '수류탄·기관총' 공격…최소 21명 사상], 뉴시스</ref> 그리고 현재 반군이와타라측 군이 수도 야무수크로를 점령하여 사실상 반군의와타라군의 승리로 끝났다.<ref>[http://mbn.mk.co.kr/pages/news/newsView.php?category=mbn00008&news_seq_no=1047362 코트디부아르 내전 사실상 종결], 매일경제, 2011.04.06.</ref>
 
2011년 4월 21일, 와타라측 군 내부에서 권력 다툼이 일어나 아비장에서 충돌하였다.<ref>[http://www.ytn.co.kr/_ln/0104_201104211828417515 코트디부아르 새 정부군에 내분 발생], YTN, 2011. 04. 21.</ref>
 
== 여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