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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갔으나, 다시 부름을 받아 무도태수(武都太守)가 되었다. 임지로 떠나기 전 조정에서는 대장군(大將軍) [[하진]](何進)과 상군교위(上軍校尉) [[건석]](蹇碩)을 보내 개훈을 배웅하였고, 개훈은 무도에 도착하기 전에 다시 부름을 받아 토로교위(討虜校尉)에 임명되었다.
 
===문단 2===
[[후한 영제|영제]](靈帝)가 개훈에게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이유를 묻자, 개훈이 답하였다.
{{인용문2|총애를 받는 신하들의 자제가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개훈은 쓸데없이 무용을 낭비하는 것이라 답하였고, 영제는 크게 감탄하며 말하였다.
{{인용문2|훌륭하다. 그대를 이제야 만난 것이 심히 아깝구나! 여태껏 이와 같은 말을 해준 신하는 없었다.}}
 
개훈은 그때 종정(宗正) [[유우]](劉虞) · 좌군교위(佐軍校尉) [[원소 (후한)|원소]](袁紹)와 함께 근위대를 통솔하고 있었다. 개훈은 이들에게 환관을 주살할 것을 제안하였고, 이들 또한 동의하여 서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에 사례교위(司隷校尉) [[장온 (후한)|장온]](張溫)이 개훈을 경조윤(京兆尹)으로 천거하였다. 영제는 개훈을 곁에 두고 싶어했으나 건석 등은 그를 꺼렸기 때문에 장온의 의견에 동조하였고, 결국 개훈은 경조윤으로 전출되었다.
 
당시 장안령(長安令)이었던 양당(楊黨)은 부친이 중상시(中常侍)였는데, 권세를 부리며 탐욕스러운 자였다. 개훈이 이를 조사한 결과 그가 1천만여 전을 수뢰한 사실을 밝혀내었다. 귀족과 외척들이 모두 양당을 비호하였으나, 개훈은 듣지 않고 수사를 계속하였다.
 
이 무렵 소황문(小黃門)인 경조(京兆) 사람 [[고망]](高望)이 황태자의 총애를 받았다. 태자는 고망의 아들 고진(高進)을 [[효렴]](孝廉)으로 삼을 것을 건석을 통해 개훈에게 부탁하였으나, 개훈은 듣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태자의 말을 들을 것을 권하며 말하였다.
{{인용문2|황태자는 황제의 한 팔로, 고망은 그분이 총애하시는 자이며 건석은 황제의 총신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들을 거스르려 하니, 세 가지 원망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개훈이 거절하며 답하였다.
{{인용문2|어진 이를 가리는 것은 나라에 보답하는 일입니다. 어질지 못한 자를 추천하지 않아 주살되는 것에 무슨 한이 있겠습니까!}}
 
===동탁이 두려워하다===
[[중평 (후한)|중평]](中平) 6년([[189년]]), 영제가 붕어하고 [[후한 소제 (13대)|소제]](少帝)가 즉위하였다. 양주의 군벌 [[동탁]](董卓)은 궁성으로 쳐들어 와 소제를 폐위하고 하태후(何太后)를 죽였다. 개훈이 동탁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를 꾸짖으니, 동탁은 개훈을 대단히 두려워하며 불러들여 의랑(議郞)으로 삼았다.
 
이때 좌장군(左將軍) [[황보숭]](皇甫嵩)의 병사 3만 명이 부풍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개훈은 그와 은밀히 공조하여 동탁을 치고자 하였다. 마침 황보숭도 수도로 소환되었는데, 개훈은 군세가 적은데다 혼자 거병하기는 어려웠으므로 함께 수도로 돌아갔다.
 
아무도 동탁에게 거스르는 자가 없었으나, 오직 개훈만은 예법을 따라 읍할 뿐이었으니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이를 보고 얼굴의 핏기가 가셨다.
 
동탁은 [[왕윤]](王允)에게 사례교위로 삼을 만한 자를 자문해줄 것을 청하였는데, 왕윤은 개훈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동탁은 개훈의 명석함을 아까워하여 월기교위(越騎校尉)에 임명하였다. 개훈은 이후 영천태수(潁川太守)로 전출되었으나, 다시 수도로 소환되었다.
 
이 무렵 하남윤(河南尹) [[주준]](朱儁)이 군무에 관해 동탁에게 아뢰었는데, 동탁은 주준을 꾸짖으며 말하였다.
{{인용문2|나는 백 번 싸워 백 번 이겼는데, 이는 모두 내 마음대로 하여 얻은 것이다. 너는 망언이나 하며 내 칼을 더럽힐 생각이냐?}}
이 말을 들은 개훈이 동탁에게 말하였다.
{{인용문2|옛날에는 [[무정]](武丁) 같은 명군도 간언을 구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당신 정도의 인물이 다른 사람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것입니까?}}
동탁은 개훈에게 '농담으로 한 말'이라고 핑계를 댔으나, 개훈은 성을 내며 말하였다.
{{인용문2|성을 내며 장난을 친다니, 그런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동탁은 결국 주준에게 사과하였다.
 
개훈은 동탁에 대한 미움이 가득하여, 결국 실의에 빠져 등창으로 죽었다. 개훈은 유언으로 동탁이 주는 물건을 받지 말라고 일렀고, 동탁은 관용을 보이기 위하여 조문품을 보내고 예법에 때라 유해를 전송하였다. 시신은 안릉(安陵)에 묻혔다.
 
아들 개순(蓋順)의 관직은 영양태수(永陽太守)에 이르렀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