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렌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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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탈출을 안내했던 페르센 주군인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3세]]는 독일의 아헨에서 페르센의 보고를 애타게 기다렸지만, 결국 탈출 성공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반대로 국왕 일가의 체포 소식이 도착했기 때문에, 구스타프 3세는 즉시 프랑스 망명 귀족과 “반혁명 십자군”을 편성할 계획을 세웠다. [[10월 1일]]에는 [[러시아 제국]]과도 군사 동맹을 체결했지만, 구스타프 3세의 암살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구스타프 3세의 행동은 매우 극단적이었지만, 이후의 [[제1차 대프랑스 동맹|대프랑스 동맹]]의 한 명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1791년]] [[8월 27일]]에는 이미 망명에 성공한 아르투 백작이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와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를 중재하여 “피르닛《[[필니츠 선언”을선언]]》<ref>Déclaration de Pillnitz</ref>을 했다. 이 선언에서 “필요한 무력을 사용하여 즉시 행동으로 옮긴다”는 내용의 선언은 혁명파에게는 협박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사실 국왕 일가의 입장만 더 곤란하게 했을 뿐이었고, [[프랑스 혁명 전쟁]]의 신호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혁명파는 협박을 받고 움추려 들기는커녕, 반대로 격분하여 전쟁을 바랬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왕의 단죄를 요구했고, 결국 바렌느 사건은 [[부르봉 왕조]]의 종말을 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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