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0일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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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이상주의자라면 이것으로 혁명은 끝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실, 입헌 의원 몇몇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입헌주의자들의 거짓 승리와, [[부르주아]]의 분열([[자코뱅파]]에서 분리된 [[푀양파]])을 뒷전으로 하고, 제2의 물결, 즉 [[민주주의]]가 대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으로 혁명을 일으킨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은 점차 수를 늘려 실업자와 임금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상 퀼로트]] 혁명 참여를 유도했고, 파리에서 서서히 정치 세력을 형성했다. 그들은 [[코르들리에 클럽]]과 자치 시의회에 결집하여 보다 더 급진적인 제2세대 지도자를 만들어 갔다. 이러한 제2의 흐름은 [[7월 17일]]의 [[샹 드 마르스의 학살]]과 클럽 폐쇄에도 쇠퇴하지 않았으며, 우울한 불만을 약 1년간 쌓아 갔다. 또한 제1의 흐름의 부산물로, [[비엔나]]와 [[베를린]]의 궁정은 망명 귀족(에미그레)의 부추김으로 《[[필니츠 선언]]》을 발표했지만, 이것은 결코 무력 개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브리소]] 등 입법부의 새로운 다수파로 등장한 [[지롱드파]]를 자극했고, 지나치게 호전적인 애국주의와 유럽의 여러 군주에 대한 공격적인 혁명 십자군(혁명의 수출)의 따위 발상을 연상시켰다. [[프랑스 혁명 전쟁|혁명전쟁]]의 발발은 정세를 악화시켰다.
 
전쟁과 경제 불안([[아시냐]]의 폭락과 [[설탕]] 가격의 상승)의 영향은 시민의 생활을 강타했다. 파리 상퀼로트들은 생활 개선을 요구하면서 다시 결집했다. 이 흐름은 이미 좌익 이데올로기를 동반하고 있었고, 생활에 직결되는 절실한 요구는 점차 탁류처럼 강하고 격렬해 졌다. 운동을 지원하는 수동적 시민은 투표권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정치적인 어필은 무장 행진 등 보다 직접적인 시위 행동으로 나타났는데, 능동적 시민 중에도 이에 동조하는 사람이 나타나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