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놀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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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은 유럽인이 가져온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이 거의 없었고, 스페인군이 [[플로리다]] 북부의 인디언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이 지역에 유럽인이 자리를 잡게 된다. 이것은 결국 플로리다 인디언의 인구의 감소를 가져오게 된다. 캐롤라이나 방위군과 인디언 동맹이 [[플로리다 반도]] 전역에서 여러 번 충돌하게 되고, 18세기 초까지 남아 인디언의 대부분을 사살되거나, 포로로 잡히게 된다. [[1763년]]에 [[스페인]]이 [[플로리다]]를 영국에 할양하면서, 스페인군은 겨우 살아남은 플로리다 인디언을 [[쿠바]]로 이주시키게 된다.
 
미국 남동부의 다양한 지파가 신천지 플로리다로 이주를 시작했다. [[1715년]] [[야마시 족]]이 스페인의 동맹으로 영국 식민지군과의 분쟁 이후 플로리다로 이동했다. [[크릭 족]]의 일부인 [[로워 크릭족]]이 플로리다로 이동을 시작했고, 곧이어 [[어퍼 크릭족]]이 그 뒤를 이었다. [[히치티어]]를 구사하던 집단의 갈래 부족인 [[미카즈키 족]]은 현재 [[탤러해시]]에 가까운 [[미카즈키 호수]] 주변에 정착했다. 이 일족은 오늘까지 미카즈키 족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카우 키퍼]]가 이끄는 [[히치티 어]]를 사용하는 다른 집단은 스페인이 17세기에 목장을 경영한 땅이었던 현재 아라추아 카운티에 정착했다. 가장 유명한 목장 중 하나가 라추아였기 때문에, 이 지역은 "아라추아 대평원"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세인트 오거스틴]]에 있는 스페인인들이 아라츄아의 크릭 족을 "야만"과 "노예"라는 뜻의 "시스템 마론"이라고 불렀지만, 이것은 세미놀 어원일 가능성이 높다. 이 시스템 마론이라는 이름은 곧 플로리다의 다른 부족도 가리키게되었지만, 각 부족은 여전히 개인적인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세미놀 전쟁 당시 플로리다에 있던 다른 집단 중 칼루사 지역 출신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스패니쉬스패니시 인디언"이라고 했던 [[유치 족]] 및 플로리다 해안 스페인인, 쿠바 인의 어장에서 살고 있었던 "랜초 인디언" 등이 있다.
 
또한 18세기 플로리다에는 도주 노예도 있었다. 스페인령 플로리다에 도착한 노예는 본질적으로 자유였다. 스페인 당국은 탈주 노예를 환영했고, 세인트 오거스틴에 인접한 [[포트 모세]]의 주민으로 살 수 있도록 허용했고, 도시 방위를 위해 그들을 민병대로 기용했다. 다른 탈주 노예는 노예로, 때로는 부족의 자유로운 일원으로 다양한 "세미놀" 갱이 되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플로리다 인디언의 하의 노예들의 부담은 영국령 식민지의 그것보다는 훨씬 가벼웠다. [[1858년]] 조슈아 리드 기딩스의 설명에 의하면, "그들은 자유민과 노예의 중간 처우를 받고 있었고, 이들 노예는 보통 자신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자신의 시간을 갖고, 소량의 옥수수와 야채를 주인에게 지불하며 충당하고 있었고, 이 클래스의 노예는 백인들이 가장 기피하는 것이었다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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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막스에서 잭슨은 군사 법정을 열고 세미놀을 지원하고, 전쟁을 선동하며 미국에게 적대한 죄로 암브리스터와 아버스놋을 고발했다. 암브리스터는 죄를 인정했지만, 아버스놋은 합법적인 거래를 했을 뿐이었다고 결백을 주장했다. 법원은 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이후 완화되어 암브리스터는 50대의 재찍형과 1년의 중노동으로 선고되었다. 하지만 잭슨은 암브리스터에게 사형을 부활시켜 [[1818년]] [[4월 29일]] 총살시켰다. 아버스놋은 그의 배 활대 끝에서 교수형을 당했다.<ref>Missall. P. 42.</ref>
 
잭슨은 세인트 막스에 있는 요새를 떠나 가즈덴 요새로 돌아왔다. 잭슨은 처음으로 모두가 평화로우며, 자신은 테네시의 내쉬빌로내시빌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보고 했다. 이후 그는 인디언이 모여들고 있고, 스페인에게서 보급을 받고 있다는 보고를 했고, [[5월 7일]] 1,000명의 병사와 함께 가즈덴 요새를 떠나 펜사콜라로 향했다. 서플로리다 총독은 펜사콜라 인디언의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이, 비무장 남성이었지만, 잭슨은 멈추지 않았다고 항의했다. 잭슨이 [[5월 23일]] 펜사콜라에 도착했을 때, 총독과 175명의 스페인 수비대는 펜사콜라 시를 잭슨에게 넘기고 바란카스 요새로 퇴각했다. 양측은 이틀동안 포격을 주고 받았고, 스페인군은 [[5월 28일]] 바란카스 요새를 넘겨주었다. 잭슨은 서플로리다에 군정 지사인 윌리엄 킹 대령을 남겨두고 귀환했다.<ref>Missall. Pp. 42-43.</ref>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