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 (1501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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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은 외가에서 태어나 살다가 아버지의 벼슬살이에 따라 5세 무렵 서울로 이사했다. 20대 중반까지는 아버지의 임지인 의흥(義興)·단천(端川) 등 외지에 살기도 했으나 대개 서울에 살았다. 그뒤 [[성수침]](成守琛)·[[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여러 책을 다독하던 중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1527년 중종 22년 부친 상을 당하여 고향에 내려와 3년간 시묘하였고, 1531년 생계가 어려워지자 처가인 김해의 탄동으로 찾아가 산해정을 짓고 제자교육에 힘썼다.
 
=== 관료 생활과사퇴와 낙향 ===
1539년 38세에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벼슬을 고사하였고, 1544년 관찰사의 면담도 거절하였다. 1548년 전생서 주부(典牲暑主簿), 1549년 명종 4년 전생서주부에 특진되었으나 고사하였고, 집 근처에 계복당과 뇌룡사를 지어 강학에 전념하였다. 1556년1551년 종부시주부로종부시 다시주부(宗簿寺主簿), 부름을1553년 받았지만,사도시 역시주부(司導寺主簿)에 고사하였고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1544년 벼슬길에 나가라는 [[이황]]의 권고도 거절하였다.
 
뒤에 인종 때와 선조 때에도 사림들이 대거 등용되었으나 그는 관직에 나아가기를 거부했다. [[1555년]] 단성 현감(丹城縣監), 1556년 종부시주부로 다시 부름을 받았지만, 역시 고사하였다. 단성현감 사직시 올린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양사에서 그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559년 조지서 사지(造紙暑司紙)에 임명되었으나 자퇴했다.
 
=== 학문 연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