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형 (문익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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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
[[광해군]]의 패륜정치에 항의하다가 [[경기도]] [[양주시|양주]]의 노원(蘆原:지금의 [[서울특별시]] [[노원구]])로 은퇴해 있던 [[이항복]]은 이덕형의 부음을 듣고 곧바로 이덕형의 사저로 찾아가 유가족들과 함께 곡을 하고 그의 시신을 염습해주고 돌아갔다고 한다. 어려운 일에 처해 죽음에 이르는 날까지 그들은 우정을 지켰으며, 이항복은 무덤 속에 넣는 이덕형의 묘지명(墓誌銘)을 직접 지어 그의 높은 학덕을 제대로 평가하기도 했다.
 
== 기타 ==
===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 조사 ===
[[원균]]과 [[이순신]]이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이순신]]의 보고 때문이었다.<ref name="leekeo204">이종호, 《과학으로 파헤친 세기의 거짓말》 (새로운사람들, 2003) 204페이지</ref> [[이순신]]은 [[원균]]의 측실 소생인 [[원사웅]]이 12살 밖에 되지 않는데, 전쟁에 공이 있는 것처럼 장계를 올렸다고 조정에 보고했던 것이다. 이런 개인적인 문제는 적을 앞둔 마당에 장수끼리 자중지란이 일어날 위기로 조정에 비쳐진 [[조선 선조|선조]]는 "수군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고 하니 그런 습관을 모두 버리라"는 교시까지 내리게 된다.<ref name="leekeo204"/>
 
그러나 이 사건은 진상을 조사하러 간 이덕형에 의해 그 내용이 완전히 밝혀진다. 원균의 외동아들 [[원사웅]]은 원균의 측실 소생이 아니라 정실 소생으로 당시 18세였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쫓아다니며 적을 여러 명 베기도 하는 등 공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이순신]]이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원균을 모함한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이순신이 하옥될 때 거론되기도 하며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원균을 제함했다고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ref name="leekeo204"/> 당시 이덕형은 [[이순신]]이나 [[원균]]과 어떤 원한관계나 이해관계가 없었다.
 
== 주요 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