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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려 태조|태조 왕건]] 때의 호족이자 통합삼한공신(統合三韓功臣) 병부령(兵部令)을 지낸 원극유(元克猷)의 후손으로,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증직된 원몽(元蒙)의 증손이고,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된 원숙정(元淑貞)의 손자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고, [[홍문관]] [[교리]] 등을 거쳐 [[절충장군]]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였다. 전라우수사 재직 중, [[1552년]](명종 6) [[제주도]]에 침투한 왜군을 격퇴하지 않았다 하여 탄핵을 받고 파지도(波知島)로 유배되었다. [[1555년]] 달량포의 왜군을 막지 않았다는 이유로 양사의 탄핵을 받았다. [[1562년]] 6월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로 부임했으나 뒤에 [[사헌부]]의 반발로 체직당하였다. [[1563년]](명종 18)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이후 길주목사에 이르러 [[1566년]] [[12월]] '관고(官庫)의 물건을 실어내어 은(銀)을 사는 밑천으로 전부 투입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67년]](선조 1)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부호군]] 겸 [[오위장]](行龍驤衛副護軍兼五衛將)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