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티유 습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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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e Serment du Jeu de paume.jpg|thumb|250px|테니스 코트의 서약, [[자크 루이 다비드]] 작]]
===삼부회의 소집===
[[1789년]] [[5월 5일]] [[미국독립전쟁]] 지원 등으로 파산 직전의 정부 재정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프랑스 왕실은 그동안 과세가 면제되어온 [[제1신분]]과 [[제2신분]]에 대한 과세를 결정하기 위해 175년만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신분별 의회인 [[삼부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제3신분]](평민)에게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과세를 피하기 위해 지지부진하게 파행되는 삼부회에 대해 민중은 [[6월 17일]] ‘국회’라고‘[[국민의회 (프랑스 혁명)|국민의회]]’라고 칭하는 집회를 열었고, 이 모임에 제2신분의 합류를 요청했다. 이러한 제3신분의 강경한 태도에 대해 왕의 동생인 [[아르투아 백작]]은 바스티유 궁전의 회의장을 폐쇄하는 단호한 조치를 강구했다. 따라서 회의장에서 배제된 제3신분 대표들은 [[6월 20일]] 회의장에 인접한 테니스 코트에서 “헌법 제정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모임을 해산하지 않고 계속할 것을” 맹세했다. 이것이 유명한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다. 이에 대해 당황한 국왕 정부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등 실권을 장악한 보수파를 중심으로 무력을 행사할 자세를 보였지만, 성직자와 귀족 47명이 국회에국민의회에 합류하였다.
 
결국 [[루이 16세]]는 반대파를 무릅쓰고 국회를국민의회를 승인하였고, 성직자, 귀족 모두를 국회에국민의회에 합류한 것을 인정하였다. [[7월 9일]]에는 국회는국민의회는 [[헌법제정국민의회]]로 개칭하고 본격적인 [[헌법]] 제정 작업에 착수했다. 한편 국왕 정부는 의회 승인하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국민의회의 위협 및 치안 악화를 이유로 군대를 [[베르사유]]에 소집했다.
 
===네케르의 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