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통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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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력 ===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다가, [[1537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문과]] 중시에도 합격하여, [[대사헌]], [[한성부 판윤]],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1558년]] [[의정부]] [[우찬성]]으로 승진했고, [[1559년]] [[의정부]] [[좌찬성]], [[1560년]] [[이조판서]], 다시 [[우의정]]으로 승진, [[1564년]] [[좌의정]]에 이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뒤 [[조선 명종|명종]]이 자신의 외삼촌 [[윤원형]]을 견제할 목적으로 [[이량 (조선)|이량]]을 세우자, [[윤원형]]의 경쟁자이기도 했던 심통원은 그를 지원하였다. [[1565년]] 왕의 외척으로서, [[윤원형]](尹元衡) 등과 권력을 남용하고 뇌물을 받아 물의를 빚었으며, 3사(三司)로부터 탄핵을 받고, [[좌의정]]에서 물러나,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1566년]] 영[[중추부]]사로서, 약방(내의원) 도제조를 겸하였다. [[1567년]] [[조선 선조|선조]] 즉위 이후 관직이 삭탈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조선왕조실록]</ref> 심통원([[좌의정]])은 [[심연원]]([[영의정]])에 이어 [[정승]] 자리에 오르면서, [[형제]] [[정승]]으로 이름을 날렸다.
 
== 함께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