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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생애 초반 ===
척화신으로 유명한 좌의정 청음 [[김상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김광찬]](金光燦)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문곡 [[김수항]]이며, 어머니는 현감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예조판서 [[김창협]](金昌協) · 증 이조판서 [[김창흡]](金昌翕)의 형이다. 이른바 노론 4대신으로 불리며, 창협(昌協), 창흡(昌翕), 창업(昌業), 창즙(昌緝), 창립(昌立)의 맏형으로 명문대가(名文大家)의 장자(長子)로 인조 26년(1648) 무자 10월 29일 [[한성부]]에서 출생하였다.
 
=== 초기 활동 ===
현종 14년(1673) 계축 26살에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숙종1년(1675) 을묘 7월 17일 선친(先親)이 화(禍)를 입어 영암에 유배되어 있었으므로 과거(科擧)를 미루고 있던 중 숙종 6년(1680) 경신 4월 3일 선친이 유배(流配)에서 풀려나자 숙종 7년(1681) 신유 내시교관(內侍敎官)을 제수 받고, 숙종 10년(1684) 갑자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재직 중 정시문과(廷試文科)에 을과(乙科)로 37살 늦게 급제하여 숙종 11년(1685) 을축 5월 25일 정언(正言), 같은 해 8월 25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같은 해 8월 22일 홍문록(弘文錄) 16명에 뽑히고, 같은 해 11월 16일 도당(都堂)에서 뽑은 홍문록(弘文錄) 15인에 뽑혔다.
 
숙종 12년(1686) 병인 3월 13일 부수찬(副修撰), 같은 해 7월 9일 수찬(修撰), 같은 해 7월 25일 헌납(獻納), 다음날 교리(校理), 같은 해 11월 24일 헌납(獻納), 같은 해 12월 10일 이조좌랑(吏曹佐郞), 숙종 13년 (1687) 정묘 12월 26일 수찬(修撰), 숙종 14년(1688) 무진 2월 6일 검상 (檢詳), 같은 해 3월 18일 수찬(修撰), 같은 해 8월 2일 응교(應敎), 같은 해 5월 15일 부응교(副應敎)에 제수 되었으나, 숙종 15년(1689)기사 윤 3월 21일 기사사화(己巳士禍)로 선친(김수항)이 진도(珍島)에 유배(流配)되어 다음달 9일 사사(賜死)되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장례를 치른 뒤 형제들과 영평(永平=현 경기도포천) 백운산(白雲山) 산중에 숨어 지냈다.
 
=== 관료 생활 ===
숙종 20년(1694) 갑술 4월 2일 선친이 사면복관(赦免復官) 되어, 같은 해 5월 5일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했고 같은 해 윤 5월 15일 승지(承旨), 같은 해 8월 19일 대사간(大司諫), 숙종 23년(1697)정축 6월 9일 승지(承旨) 등 여러 관직(官職)에 제수 되었으나 한번도 취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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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42년(1716)병신 7월 6일 행 판중추부사(行 判中樞府事)로, 같은 해 9월 11일 면직을 청하였다. 숙종 43년(1717) 정유 5월 12일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숙종 46년(1720) 경자 6월 8일 숙종(肅宗)이 승하(昇遐)하여 원상(院相)으로 정사(政事)를 돌보게 되었다.
 
=== 생애 후반 ===
경종이 즉위해 34세가 되도록 병약하고 자녀가 없자, 후계자 선정 문제로 노론․소론이 대립하였다. 경종 1년(1721) 신축 8월 20일 왕자 금(衿)을 왕세제(王世弟)로 삼았고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上疏)하여 처음에는 경종(景宗)이 대소 정사(政事)를 세제(世弟)에게 맡길 것을 허락했으나 소론(少論)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