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복의 옥: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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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허견의 옥사'''는 조선 숙종때의 정승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이 종실 복창군(復昌君), 복선군(復善君), 복평군(福平君)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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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권을 [[남인]]이 장악한 것에 긴장한 [[조선 숙종|숙종]]은 부체찰사직으로 자신의 외숙인 [[김석주]]를 천거했다. [[남인]]은 [[김석주]]가 서인인 점 때문에 임명을 반대하였지만 이것은 숙종의 의지대로 서인인 김석주가 맡게 되었다. [[남인]] 내에서 일부 반발 무마 세력이 있었는데, 이는 남인 내 온건파인 [[허적]]이 [[김석주]]의 일족이란 점도 일부 작용했다.
 
그러나 이 무렵 병판(兵判) 김석주(金錫胄),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를 남인에서 독주로 죽일 것이요, 허적의 서자(庶子) 견(堅)은 무사를 매복시킨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1680년 3월 숙종은 당시 남인의 영수이며 영의정인 허적의 조부 허잠에게 시호를 내린다. 허적의 집에 그의 조부 허잠을 위한 연시연(시호를 받은 데 대한 잔치)이 있었다. 그런데 그 날 비가 오자 숙종은 궁중에서 쓰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이라 하는 기름을 칠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든 천막을 보내려고 명하였으나 벌써 허적이 가져간 뒤였다.
 
1680년 3월 숙종은 당시 남인의 영수이며 영의정인 허적의 조부 허잠에게 시호를 내린다. 허적의 집에 그의 조부 허잠을 위한 연시연(시호를 받은 데 대한 잔치)이 있었다. 그런데이날 아침 [[허적]]의 비가집에 오자잔치상을 숙종은차릴 궁중에서 쓰는닭이 용봉차일(龍鳳遮日)이라한마리 하는날아들어 기름을 칠하여또는 물이유리 새지잔이 않도록깨지는 만든일이 천막을있었다. 보내려고[[허적]] 명하였으나등은 벌써이를 허적이불길한 가져간징조로 뒤였다여겼다.
숙종은 노하여 허적의 집을 염탐하게 하였는데 남인은 다 모였으나 서인은 [[김만기]], [[김석주]] 등 몇 사람뿐이었다. 이에 노한 숙종은 철원에 귀양갔던 김수항을 불러 영의정을 삼고, 조정의 요직을 모두 서인으로 바꾸는 한편, 이조판서 이원정의 관작을 삭탈하여 문 밖으로 내쫓으라고 하였다.
 
허잠의 연시연에 [[서인]]에서는 김석주는 핑계를 대고 불참하고 [[김만기]], [[김익훈]], [[신여철]](申汝哲) 등 소수만 참석하였다. 그런데 그 날 비가 오자 허적은 궁중에서 쓰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이라 하는 기름을 칠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든 천막을 왕이나 궁궐의 허락 없이 천막을 가져갔다. [[숙종]]은 비가 오자 용봉차일을 [[허적]]에게 보내려고 명하였으나 허적이 가져간 사실을 확인하고 분노한다.
 
숙종은 노하여 허적의 집을 염탐하게 하였는데 남인은 다 모였으나 서인은 [[김만기]], [[김석주김익훈]], [[신여철]] 등 몇 사람뿐이었다. 이에 노한 숙종은 철원에[[철원]]에 귀양갔던 김수항을[[김수항]]을 불러 영의정을[[영의정]]으로 삼고임명하고, 조정의 요직을 모두 서인으로 바꾸는 한편, 이조판서 이원정의 관작을 삭탈하여 문 밖으로 내쫓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태는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허적의 서자인 허견이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의 아들들인 복창군, 복선군 그리고 복평군의 삼형제와 함께 역모를 도모했다는 소위 ‘삼복의 변'이 적발되었다.
 
== 경과 ==
그러나 사태는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허적의 서자인 허견이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의 아들들인 복창군, 복선군 그리고 복평군의 삼형제와 함께 역모를 도모했다는 소위 ‘삼복의 변'이 적발되었다.
 
그 내용은 허견이 복선군을 보고 “주상께서 몸이 약하고, 형제도 아들도 없는데 만일 불행한 일이 생기는 날에는 대감이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될 것이오. 이때 만일 서인들이 임성군을 추대한다면 대감을 위해서 병력으로 뒷받침하겠소" 하였으나 복선군은 아무 말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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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들의 화살은 [[윤휴]]와 [[허목]]에게도 향하는데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윤휴의 죄목은 '''무례하게 대비를 단속하라고 나섰던 점''', '''복선군 형제와 친분이 돈독하고 도체찰사의 복설을 주장했던 점''', '''부체찰사의 차출 때 자신이 임명되지 않자 왕 앞에서 현저하게 불쾌한 기색을 나타내었다는 점''' 등이 지적되었다.
 
물증없이 여러 혐의들이 복합되어 [[의금부]]에 끌려가 국문을 받았으나 그는 두 차례 형신에도 굴하지 않았다. 숙종은 그에게 5월 14일 다시 유배지인 갑산으로 내려가 위리안치(울타리를 쳐놓고 밖에 못나오게 하는 형벌)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다음날 다시 사사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때 그가 사약을 마시기 직전에 했다는 말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쓰면 될 것이지 죽일 필요까지 있는가"라고 항변했다.
 
사약을 받자 [[윤휴]]는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쓰면 될 것이지 죽일 필요까지 있는가"라고 항변했다.
이렇게 하여 주자의 것만이 옳은 것이 아니라며 주자와 다른 해석을 함으로써 맹목적 주자추종주의자인 송시열과 격한 논쟁을 펼쳤던 윤휴는 송시열에 의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로써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경신대출척’이라고도 하며, 이 사건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
 
[[허목]]은 [[1675년]](숙종 즉위년) 숙종의 즉위 초 [[송시열]]에게 사형을 구형해야 된다며 [[송시열]]을 비난하는 과정에서 [[송시열]]이 효종을 가짜 왕으로 생각하고 1년복을 주장하였다. 이때 그의 발언 중 [[송시열]]이 효종을 가짜왕으로 생각했다는 구절은 효종을 모독하는 것이라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허목은 사형은 모면하였지만, 죄인으로 몰려 삭탈관직되고 도성에서 추방되었다. 도성에서 추방된 [[허목]]은 [[경기도]] [[연천군]]에 체류하다가 2년만에 죽는다. 이로서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이 사건 이후 [[숙종]]은 환국을 단행한다.([[경신환국]])
 
== 사후 ==
허견의 옥사 이후에도 [[경신환국]]이 단행되었으나, [[김석주]]와 [[김익훈]]은 [[남인]]을 몰살시킬 목적으로 [[허새의 옥사]]를 날조한다. 숙종은 이런 식으로 해서 왕권을 강화, 안정화시켰다.
 
== 기타 ==
[[허적]]의 서자 허견은 평소 싸움이 잦았는데, 민가에 행패를 부리거나 반상 신분을 가리지 않고 시비거리가 생기기도 했다. 자신의 처형과 크게 싸우고 처형의 이빨을 부러뜨린 일이 있었는데, 그의 처형은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첩이자 대비인 [[명성왕후]] 김씨의 서모였다.
 
천민이지만 국왕의 외할아버지의 첩이고, 대왕대비의 서모인 이를 구타하였다는 점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숙종은 허견의 고신을 강등시키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해두고 있었다.
 
또한 [[김우명]]에 의해 복창군, 복평군 등의 역모 고변이 있었으나 [[김우명]]의 무고로 밝혀지면서 조야는 김우명을 처벌하라는 여론이 나왔고, [[김우명]]의 처벌이 확실시되자 대비 [[명성왕후]]가 정청에 나타나 통곡을 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윤휴]]는 여인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며 왕에게 대비를 조관하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대비를 조관하라는 발언에 숙종의 비위가 상하게 된다.
 
허견과 윤휴에 대한 왕의 미움 역시 복합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 관련 항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