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폰 발트부르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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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는 끝까지 카를 5세의 지지자로 남아 있기는 했지만,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의 조항들에 대해서는 불만을 표하였다. 특히 그의 교구 소재지인 아우크스부르크 내에 난동을 피우는 자들을 다룰 때 더욱 그러하였다. 당시 아우크스부르크 교구의 상황은 참담하였다. 교구 사제들은 대부분 무식하고 비열하였으며, 이러한 사제들에게 실망한 신자들은 차츰 프로테스탄티즘에 동조되어갔다. 오토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교리 교육, 사목 방문, 교구 시노드, 사목교서 및 종교 지침을 개선하는 것 등을 통하여 가톨릭 신앙을 다시 회생시키기 위하여 부던히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의 거주지에 딜링엔 대학교와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564년 오토는 이러한 업무 및 시설 관리를 [[예수회]]에 일임하였다.
 
1568년 이래 오토는 평생을 로마에서 살다가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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