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281 바이트 추가됨 ,  10년 전
==== 사회 참여 활동 ====
===== YMCA =====
{{참고|기독교청년회|105인 사건}}
[[1910년]] [[8월]] [[한일 합방]] 이후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하였다. 이후 교육 계몽활동에 나섰고, 청년들의 깨달음과 실력 양성, 해외 유학과 견문 시찰을 청년들에게 당부하였다. [[1913년]] [[조선총독부]]는 [[YMCA]]의 확장을 경계, 어용단체인 유신회(維新會)를 동원, 이 청년회를 파괴하였고, 이 때문에 간부들은 축출, 구금, 국외추방 당하거나 해외망명을 하였다. 출국한 [[이승만]]의 [[미국]] 체류를 위한 장학금을 지원하는 한편 [[윤치호]]에게도 출국을 권한다. 그러나 노부모가 생존해있던 [[윤치호]]는 출국을 주저한다.
 
그러나 그는 1913년 황성 YMCA 총무에 취임하여, 지도자들의 이탈과 구속, 추방 등의 가운데 [[윤치호]]와 함께 YMCA의 간판을 지키고 청년회를 사수하였다. [[1914년]] 재일본조선YMCA를 비롯한 세브란스·배재·경신과 개성의 한영서원, 광주의 숭일YMCA, 군산의 YMCA연맹, 전주의 YMCA신흥, 공주의 YMCA연맹 등 학생YMCA와 연합, 황성기독교청년회와 통합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는 한국 YMCA의 모태가 되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꾸준히 [[계몽]]운동에 참가했는데, 이는 1920년대 조선 [[기독교계]]에서 계몽운동에 중점을 둔 사회참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기독교청년회([[기독교청년회|YMCA]])는 [[3·1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그도 이 일로 관련자로 지목되어 6개월간 구금되었으나 혐의점이 없어 풀려났다.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의 전신인 소년척후단조선총연맹 초대 총재,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하면서 다양한 사회운동을 하였다.그러나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으로부터 조선독립선언문에 서명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은 거부하였다.
 
===== 청년들과의 교유 =====
그 뒤 그는 YMCA 청년회의 제2대 총무에 취임한다.<ref>[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3101471901 개화창구 봉사 소비자.환경운동/YMCA 창립 90년] 조선일보 1993년 10월 14일자</ref> 그는 기독교에 늦게 입문하여 나이가 들어서 젊은 사람들과 함께 청년회 운동을 하였고, 사망하는 해에도 [[신간회]] 초대 회장을 맡는 등 끝까지 원기 왕성한 활동을 펼쳤으며, 유머가 넘치는 밝은 성격이라 "만년청년"으로 불렸다. 당시 보수적인 이들은 "나이지긋한 분이 체통을 지키지 않는다"며 그의 그러한 행동에 불만을 가졌으나, 이상재 자신은 "내가 청년이 되야지, 청년더러 노인이 되라고 할 수 없다"면서 청년들과 교류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또한 그 자신은 셋방에서 살면서도 어려운 고학생이 있으면 학비를 줄 정도로 청년들을 다음 세대의 지도자로 키우는 일에 헌신하였다.

편집

2,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