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됭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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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1={{국기그림|프랑스}} [[앙리 페탱]]
|지휘관2={{국기그림|독일 제국}} [[에리히 폰 팔켄하인]]
|병력1=
|병력2=
|피해1=사상자
|피해2=사상자
}}
'''베르됭 전투'''는 [[1916년]]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의 소도시 [[베르됭]]에서 프랑스군과 독일군이 치른 전투로 [[제1차 세계대전]] 때 가장 격렬했던 전투로 불릴 만큼 치열했다.
==배경==
당시 독일 제국의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프랑스가 마지막 병사까지 투입하지 않을 수 없는 지구전을 위한' 공격지점을 선택함으로써 프랑스군을 피흘려 죽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군은 그 지점으로 [[베르됭]] 요새와 그 주변 [[뫼즈 고원]]의 요새들을 선정해 대규모 군대와 대포를 동원했다.
==전투 과정==
[[1916년]] [[2월 21일]] 에 독일군은 1400문 이상의 대포를 동원해 새벽부터 12시간 이상 매 시간당 10만 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 4일 동안에 기습적인 독일군의 포격으로 프랑스군은 10만 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2월 24일]]에 프랑스군 제2방어선이 무너지고 [[2월 25일]]에는 베르됭 최후 전방 보루였던
이에 프랑스군은
▲[[1916년]] [[2월 21일]] 에 독일군은 1400문 이상의 대포를 동원해 새벽부터 12시간 이상 매 시간당 10만 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 4일 동안에 기습적인 독일군의 포격으로 프랑스군은 10만 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2월 24일]]에 프랑스군 제2방어선이 무너지고 [[2월 25일]]에는 베르됭 최후 전방 보루였던 [[두오몽]] 요새가 함락되었다.
5월이 되자 전투는 3번째 국면을 맞아 독일군이 뫼즈 고원을 재공격하여 함락시키자 프랑스군은 방어선이 뚫린 절제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이때 영국군과 프랑스군 연합군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솜므 전투|솜 강에 주둔한 독일군을 공격]]했고 동부 전선에서도 러시아군이 공격하자 독일군은 솜 강 방어를 위해 병력을 분산하였다.
▲이에 프랑스군은 앙리 페탱 장군의 휘하 아래에 [[2월 26일]]부터 [[2월 29일]]까지 전력을 다해 맞서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시켰다. 독일군은 3월 28일부터 재공격을 했으나 프랑스군의 방어는 더욱 완강해졌고 소강상태 후에 전투는 계속되어 3월과 4월 [[뫼즈 강]] 동서쪽 언덕과 능선에서는 포격과 공격, 반격, 점령, 탈환이 반복해졌다.
8월이 되자 프랑스군은 공격을 재개해 잃었던 요새와 영토를 탈환했고 10월에 대대적인 공세로 독일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이 전투로 독일은 33만 7000명을, 프랑스는 37만 1000명 이상이라는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냈고 베르됭 전투의 실패로 [[독일]]의 [[빌헬름 2세]]는 팔켄하인을 해임하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참모총장에 임명했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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