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됭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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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1={{국기그림|프랑스}} [[앙리 페탱]]
|지휘관2={{국기그림|독일 제국}} [[에리히 폰 팔켄하인]]
|병력1=페탱75개 휘하의 군대사단
|병력2=7개45개 사단, 대포 1400문
|피해1=사상자 40만2000명40만 2000명 ~ 54만2000명.54만 사망자2000명, 16만3000명이중 16만 3000명 이상 전사
|피해2=사상자 35만3000명35만 3000명 ~ 43만4000명43만 4000명. 사망자이중 14만3000명14만 3000명 이상 전사
}}
'''베르됭 전투'''는 [[1916년]]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의 소도시 [[베르됭]]에서 프랑스군과 독일군이 치른 전투로 [[제1차 세계대전]] 때 가장 격렬했던 전투로 불릴 만큼 치열했다.
 
==배경==
당시 독일 제국의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프랑스가 마지막 병사까지 투입하지 않을 수 없는 지구전을 위한' 공격지점을 선택함으로써 프랑스군을 피흘려 죽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군은 그 지점으로 [[베르됭]] 요새와 그 주변 [[뫼즈 고원]]의 요새들을 선정해 대규모 군대와 대포를 동원했다.
 
당시 [[독일 제국]]의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프랑스]]가 마지막 병사까지 투입하지 않을 수 없는 지구전을 위한' 공격지점을 선택함으로써 프랑스군을 피흘려 죽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군은 그 지점으로 [[베르됭]] 요새와 그 주변 [[뫼즈 고원]]의 요새들을 선정해 대규모 군대와 대포를 동원했다. 프랑스도 독일군의 공격을 알고 있었으나 [[베르됭]]이 아닌 다른 곳일 것이라고 생각해 아무 방비도 해놓지 않아 제1차 세계대전 때 가장 극심한 포격을 받았다.
 
==전투 과정==
[[1916년]] [[2월 21일]] 에 독일군은 1400문 이상의 대포를 동원해 새벽부터 12시간 이상 매 시간당 10만 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 4일 동안에 기습적인 독일군의 포격으로 프랑스군은 10만 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2월 24일]]에 프랑스군 제2방어선이 무너지고 [[2월 25일]]에는 베르됭 최후 전방 보루였던 [[두오몽]] 요새가 함락되었다.
 
이에 프랑스군은 앙리[[필리프 페탱]] 장군의 휘하 아래에 [[2월 26일]]부터 [[2월 29일]]까지 전력을 다해 맞서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시켰다. 독일군은 3월 28일부터 재공격을 했으나 프랑스군의 방어는 더욱 완강해졌고 소강상태 후에 전투는 계속되어 3월과 4월 [[뫼즈 강]] 동서쪽 언덕과 능선에서는 포격과 공격, 반격, 점령, 탈환이 반복해졌다.
[[1916년]] [[2월 21일]] 에 독일군은 1400문 이상의 대포를 동원해 새벽부터 12시간 이상 매 시간당 10만 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 4일 동안에 기습적인 독일군의 포격으로 프랑스군은 10만 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2월 24일]]에 프랑스군 제2방어선이 무너지고 [[2월 25일]]에는 베르됭 최후 전방 보루였던 [[두오몽]] 요새가 함락되었다.
 
5월이 되자 전투는 3번째 국면을 맞아 독일군이 뫼즈 고원을 재공격하여 함락시키자 프랑스군은 방어선이 뚫린 절제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이때 영국군과 프랑스군 연합군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솜므 전투|솜 강에 주둔한 독일군을 공격]]했고 동부 전선에서도 러시아군이 공격하자 독일군은 솜 강 방어를 위해 병력을 분산하였다.
이에 프랑스군은 앙리 페탱 장군의 휘하 아래에 [[2월 26일]]부터 [[2월 29일]]까지 전력을 다해 맞서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시켰다. 독일군은 3월 28일부터 재공격을 했으나 프랑스군의 방어는 더욱 완강해졌고 소강상태 후에 전투는 계속되어 3월과 4월 [[뫼즈 강]] 동서쪽 언덕과 능선에서는 포격과 공격, 반격, 점령, 탈환이 반복해졌다.
 
5월이 되자 전투는 3번째 국면을 맞아 독일군이 [[뫼즈 고원]]을 재공격하여 함락시키자 프랑스군은 방어선이 뚫린 절제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이때 영국군과 프랑스군 연합군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솜 강에 주둔한 독일군을 공격했고 동부 전선에서도 러시아군이 공격하자 독일군은 솜 강 방어를 위해 병력을 분산하였다. 병력을 분산하자 독일군의 전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공세는 수시로 전환되어 7월에 결국 독일군은 베르됭을 점령해 프랑스의 저항의지를 약화시키려던 자신들의 계획이 엄청난 물자와 인명 손실을 가져와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아 물러났다.
 
8월이 되자 프랑스군은 공격을 재개해 잃었던 요새와 영토를 탈환했고 10월에 대대적인 공세로 독일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이 전투로 독일은 33만 7000명을, 프랑스는 37만 1000명 이상이라는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냈고 베르됭 전투의 실패로 [[독일]]의 [[빌헬름 2세]]는 팔켄하인을 해임하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참모총장에 임명했다.
 
==주석==
익명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