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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강과 함께 부군에게 서형 태자 급을 참소해 죽게 만들었으며, 그 과정에서 친형 공자 수도 죽임을 당해 태자 자리를 이어받았다.<ref name="zk">사마천, 《사기》 권37 위강숙세가제7</ref><ref name="zj">좌구명, 《좌전》 환공 16년</ref>
==즉위 후==
기원전 700년,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었으나, 공자 수의 스승 좌공자 설(洩)과 태자 급을 보좌한 우공자 직(職)<ref>둘 다 혜공의 할아버지 [[위 장공|장공]]의 서자로, [[두예]]는 춘추좌전집주에서 “좌우 잉첩의 아들이므로 그렇게 불렸다”라고 설명했다.</ref>은 이를 원망했다.<ref name="zk"/><ref name-="zj"/>
 
당시 송나라는 [[정 여공]]의 즉위를 도와줬으나, 그 대가로 정나라가 감당할 수 없는 뇌물을 요구하고 노나라의 중재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정나라 · 노나라와 송나라는 사이가 벌어졌었다. 2월, 혜공은 아직 아버지의 장례를 지내기 전에 위후를 일컫고<ref>주나라 제후의 예법에는 상중에는 자기 작위를 일컫지 않기 때문에, 무례한 일이었다.</ref> 송나라 편을 들어 제나라, 연나라와 연합하여 노나라, 정나라, 기나라의 연합군과 싸웠으나, 제 · 송 · 위 · 연 연합군이 노 · 정 · 기 연합군에 대패했다.<ref name="cz-h13">《춘추좌씨전》 환공 13년</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