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7세 두카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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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정보
|이름= 미카일미카엘 7세<br /> Μιχαήλ Ζ΄ Δούκας
|그림=NomismaMikaelVIIDoukas.jpg
|재위= [[1071년]] - [[1078년]]
|황후=<small>마리아 바그라티오니</small>
|이전 황제=[[로마누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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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카일미카엘 7세 두카스''' ([[그리스어]]: Μιχαήλ Ζ΄ Δούκας, [[1006년]] – [[1067년]])는 [[1071년]]부터 [[1078년]]까지 [[비잔티움 황제 연대표|비잔티움의 황제]]였다. 별칭은 ''파라피나케스''(''Parapinakēs'', 4분의 1이란 뜻)였다.
 
미카일미카엘 두카스는 [[콘스탄티누스 10세]]와 [[황후]] [[에우도키아 마크렌보리티사]]의 맏아들로 콘스탄티누스가 황제에 오르기 전에 1050년 경에 태어났다. 아버지 콘스탄티누스가 [[1067년]] 죽자 그는 아직 스스로 제국을 통치하기 힘든 나이였고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 에우도키아가 섭정으로 제국을 다스렸다.
 
[[1068년]] [[1월 1일]] 에우도키아가 [[로마누스 4세|로마누스 디오게네스]]와 결혼함으로써 로마누스가 황제가 되었고 미카일은미카엘은 다른 두 동생과 함께 명목상 공동 황제로 되었다. [[1071년]] 여름, 로마누스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알프 아르슬란]]이 이끄는 [[셀주크 제국]]군에게 대패하고 포로로 잡혔는데 그의 삼촌 요한네스와 스승인 [[미카일미카엘 프셀루스프셀로스]]는 로마누스를 폐위하고 황후 에우도키아를 수녀원에 유폐시킨후 미카일을미카엘을 정식 황제로 삼았다. 셀주크 투르크의 포로에서 풀려난 로마누스는 미카일의미카엘의 제위를 인정하지 않고 군대를 모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는데 결국 패하고 실명의 형벌을 받았고 그로 인해 생긴 상처로 죽었다.
 
미카일의미카엘의 치세는 처음부터 혼란의 연속이었다. [[1072년]] 불가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을 기점으로 곳곳에서 반란이 줄을 이었고 [[1073년]] 셀주크 투르크가 만지케르트의 승리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며 아나톨리아로 진군해 들어왔다. [[로마 가톨릭|서방교회]]는 점점 더 제국의 영토로 세력을 확장했고 제국 본토의 물가는 엄청나게 올라서 화폐가치가 1/4로 내렸기 때문에 미카일의미카엘의 별명이 "4분의 1"(파라피나케스)이 되었다.
 
미카일은미카엘은 심약하고 무능했고 환관 니케포리체스의 손아귀에 좌지우지 되었다. 니케포리체스는 프셀루스와 요한네스 두카스를 몰아내고 사악한 정치를 펼쳤다. 또한 노르만족 용병대장인 루셀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해 셀주크를 끌어들여 결국 셀주크의 아나톨리아 지배를 공고히 하게 만드는 실책을 저질렀다.
 
[[1077년]] 11월 장군 니케포루스 브리엔니우스는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황제를 자칭하고 거의 동시에 제국의 동쪽에서도 [[니케포루스 3세|니케포루스 보타네이아테스]]도 아나톨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듬해 3월 치솟는 물가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미카일은미카엘은 제위에서 쫓겨나고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나중에 그는 [[에페소스]] 대주교가 되었고 1090년 경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죽었다.
 
{{전임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