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라극장: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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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초극장은 일본 자본에 의해 시작되었다. <br />
명치좌, 황금좌와 함께 같은 시기인 1935년에 세워 졌으며, <br />
개관 당시 극장명은 약초(若草)극장 혹은 약초 동보 극장으로 불렸다.
 
위치를 초동(약초정)으로 잡았기 때문에 극장이름도 와까구사게끼(와까게끼, 약초좌)라 했다. <br />
 
동보라는 명칭은 일본의 메이저 영화사인 동보영화사를 지칭하는 것으로, <br />
위치를 초동(약초정)으로 잡았기 때문에 극장이름도 와까구사게끼(와까게끼, 약초좌)라 했다.
동보라는 명칭은 일본의 메이저 영화사인 동보영화사를 지칭하는 것으로,
당시 일본 영화사들의 국내 투자가 부분적으로 행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지 면적은 약 300평으로 도로면이 좁아 극장 전면을 대로에 접하게했다. <br />
 
건축연면적은 658평으로 철골철근 콘크리트 구조이며, 2개층의 관람석을 갖는 순수 영화관으로 계획되었다.<br />
대지 면적은 약 300평으로 도로면이 좁아 극장 전면을 대로에 접하게했다.
당시에는 영화상영과 공연물 등이 극장에 함께 선보였다.<br />
건축연면적은 658평으로 철골철근 콘크리트 구조이며, 2개층의 관람석을 갖는 순수 영화관으로 계획되었다.
약초극장은 석을 보유한 1,172 대형극장으로서, 한국영화사에서 끊임없이화제를 만들었던 공간이기도하다.<br />
당시에는 영화상영과 공연물 등이 극장에 함께 선보였다.
 
 
약초극장은 석을 보유한 1,172 대형극장으로서, 한국영화사에서 끊임없이화제를 만들었던 공간이기도하다.
 
 
해방 이후1946년, 지배인이던 홍찬이 극장을 인수하여 수도극장으로 명을 바꾸고
이후 단성사, 국도극장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극장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br />
 
 
1954년 12월 14일에는 국내 최초의 키스신이 나오는 영화 <운명의 손, 한형모 감독>이
개봉되어 당시 대중들은 문화적 충격을 받게 된다.<br />
 
1955년 이후로는 외화 상영을 주로 하게 되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의 영화를 상영하게 된다.<br />
 
1955년 이후로는 외화 상영을 주로 하게 되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의 영화를 상영하게 된다.
 
 
그 후 수익악화로 1962년 4월 소유주가 바뀌게 되고 그해 9월13일 스카라 극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재 개관을 한다.
 
 
그 후 수익악화로 1962년 4월 소유주가 바뀌게 되고 그해 9월13일 스카라 극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재 개관을 한다.<br />
90년대 초까지 대형상영관이라는 현대식 시설로 서울 10대 영화관으로 손꼽히기도 하였다.
또한 영화 주간지 씨네21이 실시한 극장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br />
 
그후 2002년 12월에 의자를 전면 교체하고 좌석간 간격을 넓히는 등 대대적인보수를 한다.<br />
 
그후 2002년 12월에 의자를 전면 교체하고 좌석간 간격을 넓히는 등 대대적인보수를 한다.
 
 
하지만 근대 문화유산으로 등록 예고되자마자 2005년 12월 6일 철거되어 사라지게 되어 지금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ref>이근혜, <<일제강점기 근대 문화 공간 표현 특성에 관한 연구>> 경원대학교 일반대학원, 2008, p94-98</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