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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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과 사후: 공식명칭이 518민주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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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판 ===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수구보수주의 세력은 그의 과오도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리영희가 자신의 저서《8억인과의 대화》에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지나치게 미화하였다고 비판하는 동시에, 그의 저서가 오히려 '북한맹과 시장맹'이라는 치명적인 오류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에는 한계도 존재한다.《8억인과의 대화》라는 그의 책은 그가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라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책이 역서이기 때문에, 책의 내용을 근거로 그가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지나치게 미화하였다는 비판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고 보기 힘들다. 당시는 그가 한양대에 재직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중국문제연구소) 그는 중국에 관한 새로운 연구실적으로 위 책을 번역했을 수도 있다. <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0192258 "리영희가 우리 사회 시장맹·북한맹 만들어"]</ref>
 
[[김광동]], [[변희재]]등 보수주의 논객들은 '리영희는 중국의 [[마오쩌둥주의|마오주의]]를 미화했다.는 책임을 면할수 없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이런 비판에는 좀더 사실적으로 판단할 필요도 있다. 실제로 리영희는 중국이나 북한에서 자행된 찬양 수준의 수사법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삭막한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소개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이 그에게 대안으로 다가올 수 있었던 대표적인 사례는 1976년의 당산 대지진이었는데, 이는 당해 뉴욕시 정전사건과 비교되어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신을 믿는 뉴욕 시민은 정전에서 아비규환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공산당, 빨갱이라는 중국의 시민들은 지진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ref>《억지와 위선》,[[김광동]] 외 6인 공저,북마크</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