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인 바이에른 여공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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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thumb|마리아 소피아 '''바이에른의 마리아 소피아'''(Maria Sofia di Baviera, 1841년 10월 4일 ~ 19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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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요제프]]와 [[바이에른 공주 루도비카]]의 딸로 [[뮌헨]]에서 태어났다. 독일식 이름은 ''바이에른의 마리 조피 아말리에''(Marie Sophie Amalie in Bayern). [[바이레른의바이에른의 헬레네|투른-탁시스 후작부인 헬레네]] 나 오스트리아의 황후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는 그녀의 언니다.
 
[[1859년]] [[2월 3일]] 마리아 소피아는 양시칠리아의 왕태자인 프란체스코와 결혼했고 그 해에 시아버지 [[양시칠리아의 페르디난도 2세|페르디난도 2세]]가 서거함으로써 그녀는 양시칠리아의 왕비가 되었다. [[1860년]] 9월, [[가리발디]]가 이끄는 군대가 수도 [[나폴리]]를 덮쳤고, 국왕 부부는 나폴리에서 북쪽으로 8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요새 [[가에타]]에 주둔했다. 이듬해 초까지 이어진 공방전에서 마리아 소피아는 군사들을 사기를 독려하고 손수 부상자들을 살피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에타 요새는 함락되었고 [[로마]]로 망명한 부부는 유럽 각국과 연락을 취하며 왕국의 부활을 꾀했다. 그러나 [[1870년]] 두 사람이 머무르고 있던 로마 또한 이탈리아에 병합되었고 부부는 다시 망명을 떠나야 했다. [[1894년]] 프란체스코가 죽은 뒤에도 그녀는 파리에서 왕정 복고를 노렸다. [[1900년]] 일어난 [[움베르토 2세]]의 암살 사건에 그녀가 관련되어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제1차세계대전]] 중에도 그녀는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편에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