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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공 2년([[기원전 721년]]), 사공 전무해(展無駭)가 노나라의 부용국 극(極)나라를 쳤고, 대부 비금보(費庈父)가 극나라를 멸망시켰다.<ref name="cze2">《춘추좌씨전》 은공 2년</ref>
 
은공 5년([[기원전 718년]]), 노나라 당(棠) 땅에서 물고기 잡는 것을 보러 갔다. [[장희백]]은 자연에서 물품을 직접 생산하는 일은 임금의 직분이 아니라고 말렸으나, 은공은 핑계를 대고 갔다. 이해 장희백이 죽자, 은공은 장희백이 간언한 것을 듣지 않은 것을 한하여 후히 장례를 치렀다.<ref name="sk33"/><ref name="cze5">《춘추좌씨전》 은공 5년</ref>
 
자신이 일찍이 정나라의 포로인 적이 있었고, 은공 4년([[기원전 719년]]), 경 공자 휘(公子翬)가 은공의 명령을 무시하고 위나라, 송나라, 채나라, 진나라와 함께 정나라를 친 적이 있었으나,<ref name="cze4">《춘추좌씨전》 은공 4년</ref> 은공 5년(기원전 718년)에는 정나라의 공격을 받은 송나라의 구원 요청을 결국 거절하였고, 은공 6년([[기원전 717년]])에는 마침내 정나라와 우호를 맺었다.<ref name="zk14">사마천, 《사기》 권14 12제후연표제2</ref><ref name="cze6">《춘추좌씨전》 은공 6년</ref> 은공 8년([[기원전 715년]])에는 당시 주나라와 사이가 껄끄러운 [[정 장공]]의 제안을 받아들여 노나라가 주공의 제사 용도로 관리하는 정나라 내의 허전과 정나라가 태산에 제사를 드리는 데 쓰는 탕목읍인 노나라 내의 팽읍을 맞바꾸었다.<ref name="sk33"/><ref name="cze8">《춘추좌씨전》 은공 8년</ref> 은공 6년에 또 제나라와 회합하여 우호를 맺었고,<ref name="cze6"/> 은공 10년([[기원전 713년]])에는 제나라, 정나라와 회견하여 송나라를 치고자 했고, 은공이 송나라를 무찌르니 정나라는 송나라의 고(郜) ·방(防)을 접수하여 노나라에 주었다.<ref name="cze10">《춘추좌씨전》 은공 10년</ref> 은공 11년에는 제나라, 정나라와 함께 허나라를 쳤다.<ref name="cze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