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좌부 불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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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바다'''(Theravada)라는 말은 "장로(長老)들의 길"이란 뜻으로 상좌부(上座部)라고 한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부처]]가 사용하던 [[팔리어]]로 된 경전을 근간으로 하여,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대승 경전]]과 대비된다. 이 [[팔리어 경전]](《[[아함경]]》)은 [[기원전 1세기]]경 [[스리랑카]]에서 최초로 쓰인 것으로 [[기독교]] 시대가 열린 이후에 형체를 갖추어가기 시작한 [[대승]]권의 [[산스크리트어]] [[대승경전|경전]]이나 다른 경전보다도 [[부처]]의 가르침이 더 정확하게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ref>보리수선원</ref>
 
{{== 불교 전통 연표}} ==
{{불교 전통 연표}}
 
== 역사 ==
불멸 후 100년의 [[근본분열]]로 교단은 두 부파로 나뉘었는데 그 중 보수파인 상좌의 사람들에 의한 일파가 상좌부이다.<ref name="글로벌">[[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세계의 종교/불 교/불교의 분파#상좌부불교|종교·철학 > 세계의 종교 > 불 교 > 불교의 분파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세계의 종교/불 교/불교의 분파 > 상좌부불교]],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ref>
 
[[북방불교]]의 자료들에 의하면 불멸(佛滅) 후 100년 [[아쇼카]]왕 치세 때, [[마하데바]](Mahadeva: 大天)라고 하는 진보파 비구가 교의에 관한 5개조의 신설(新說)을 제창하고 그 승인을 교단에 구했을 때에, 또는 남방불교의[[남방불교]]의 자료인 실론의[[실론]]의[[도사]](島史)》나 《[[대왕통사]](大王統史)》에 따르면, 와지족의[[와지족]]의 비구가 계율에[[계율]]에 대한 [[십사]](十事)의 신설(十事非法)을 주창했기 때문에(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후자가 승인되고 있다) 불교교단이 신설에 찬성하는 진보파의 [[대중부]](大衆部)와 이에 반대하는 보수파의 상좌부(上座部)로 양분되었다. 이것이 [[근본분열]](根本分裂)이며, 이를 계기로 [[부파불교]]의 시대로 들어간다.<ref name="글로벌2">[[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세계의 종교/불 교/불교의 분파#소승20부|종교·철학 > 세계의 종교 > 불 교 > 불교의 분파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세계의 종교/불 교/불교의 분파 > 소승20부]],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ref>
 
이 상좌부는 불멸 후 300년 초에 [[본상좌부]](本上座部)와 [[설일체유부]](說一體有部)로 나뉘고 본상좌부는[[본상좌부]]는 [[히말라야]] 지방으로 옮겨 [[설산부]](雪山部)라고 불리었으며, [[캐시미르]] 지방을 본거(本據)로 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ref name="글로벌"/> 그리고 그 후의 분파에 의한 8부의 성립은 모두 [[설일체유부]]의 것으로 된 것이며, 따라서 [[설일체유부|유부]]는 상좌부계(上座部系) 중에서도 여러 부파 중 최대의 것이 되었고, 후에 일어난 대승불교의[[대승불교]]의 [[소승불교]]에 대한 비판{{.cw}}논란(論難)은 거의 모두 이 [[설일체유부|유부]]에게 돌려지는 상태였다. 그래서 상좌부불교라고 하면 당연히 [[설일체유부]]가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ref name="글로벌"/>
 
{{불교 전통 연표}}
 
== 설일체유부 ==
원래 [[본상좌부]](本上座部: [[설산부]])와 [[설일체유부]]는 입장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본상좌부]]에서는 경과[[경장|경]]과 율을[[율장|율]]을 중시한 데 대하여 [[설일체유부|유부]]에서는 [[논장|]](論)을 중시하였다.<ref name="글로벌"/> 논은[[논장|논]]은 교법에 대한 연구로서의 [[아비달마]]이며, 유부가[[설일체유부|유부]]가 전거(典據)로 삼은 것은 [[기원전 2세기]] [[카티야야니푸트라]](Katyayanputra: 迦多衍尼子)가 저술한 《[[발지론]](發智論)》이었다.<ref name="글로벌"/>
 
그후 6종의 논이 만들어져 합하여 《[[6족발지]](六足發智)》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행하여졌으며, 기원 2세기 [[쿠샨 왕조]]의 [[카니시카]]왕의 보호 아래 연구 성과에 대한 집대성(集大成)이 이루어져서,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200권의 대저(大著)로 발전하여 [[설일체유부|유부]]의 교의가 완성되었다.<ref name="글로벌"/> 비바사(毘婆沙)란 분석 또는 주석이라는 뜻으로, 《[[발지론]]》을 축어적(逐語的)으로 해석하면서 다른 여러 부파의 교설을 백과전서(百科全書)처럼 인용하고 이를 유부의 입장에서 비판한 것이다.<ref name="글로벌"/>
 
그러나 《[[대비바사론]]》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이의 강요서(綱要書)가 만들어지고, 특히 4세기에 [[세친]](世親)이 저술한 《[[구사론]](俱舍論)》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중시되었다. [[세친]]은 [[설일체유부|유부]](有部)에서 최후로 분파하여 경전만을 의지(依支)하는 [[경량부]](經量部)에 속하며, 《[[구사론]]》을 통해 [[유부]]의 교리를 비판적으로 해설하였다.<ref name="글로벌"/> 예를 들면, 《[[구사론]]》 〈수면품〉에서 [[세친]]은 [[삼세실유설]]을 [[경량부]]적 입장, 즉 [[과미무체설]]의 입장에서 반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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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보기 ==
* [[부파 불교]]
* [[대중부 불교]]
* [[소승 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