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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는 밀라노에 있던 궁을 버리고 [[라벤나]]의 행궁에 틀어박혀 있었고, 라에티아(지금의 스위스 일대)에서 아레만니 족과 전쟁중이던 스틸리코가 알라리크의 침공 소식을 듣고 다급히 그들을 항복시킨 뒤 이탈리아로 향했다. [[403년]] 보르렌티아의 전투에서 서고트군은 스틸리코의 군대에 패했다. 알라리크는 그 와중에 로마에 대한 급습을 시도했지만, 이마저도 스틸리코에게 저지당한 뒤 도망쳤다.
 
패주한 뒤 일리리쿰으로 돌아와 재기를 도모했다. 그 뒤 스틸리코와의 교섭 끝에 서로마의 우군으로 협조한다는 조건으로 서로마로부터 정착할 땅을 받는다는 약조에 동의했지만, [[408년]]에 호노리우스 황제가 스틸리코를 역적으로 몰아 처형하고 합의는 일방적으로 파기되었다. 알라리크는 다시 이탈리아에 침입했다. 하지만 황제가 있던 라벤나는 치지 않고, 대신 로마로 진격해 시를 겹겹이 에워싸고 로마로 들어가는 모든 물자를 차단해 로마는 식량난에 고통을 겪었다. 여기서평화교섭을 위해 찾아온 원로원 의원들과의원 평화교섭을바실리우스와 하면서수석 의원들의서기관 재산까지요하네스 내놓으라며앞에서 으르는알라리크는 그에게로마 성벽에서 물러나는 대신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로마 안에 있는 모든 금과 은, 모든 값지고 귀중한 동산, 그리고 야만족 출신임을 입증할 수 있는 모든 노예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의원들이 "그러면 우리에게는 무엇을 남겨주시렵니까?"라고 호소하자, 알라리크는 조소하듯이 "목숨은 남겨주지!"라고 대답하고 있다. 얼마 뒤 금 5천 파운드와 은 3만 파운드, 비단옷 4천 벌, 주홍색 옷감 3천 필, 후추 3천 파운드를 받고 알라리크는 로마의 포위를 푸는 데에 동의했다.
 
이후 투스카니로 진군해 그곳에 겨울 막사를 세우겠다고 선언한 알라리크의 휘하로 4만여 명의 야만족 노예들이 모여들었고, 처남 아타울푸스가 고트족과 훈족에서 온 증원군을 이끌고 도나우 강변에서 테베레 강변까지 로마군을 뚫고 왔다. 알라리크는 다시 세 명의 원로원 의원들을 자신의 사절로 라벤나에 보내 인질 교환과 조약 체결을 건의했는데, 종전대로 알라리크의 서로마 군대 총사령관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과 로마에서 해마다 곡물과 현금을 보조금으로 지급해주는 것, 그리고 이탈리아와 도나우 강 사이에 있던 다르마티아와 노리쿰, 베네치아의 속주를 자신에게 줄 것이 그의 요구사항이었다. 로마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노리쿰을 얻는 것만으로 만족할 의향도 비추었다.<ref>노리쿰은 당시 황폐하고 헐벗은 지역인데다 항상 야만족들의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던 땅으로, 그가 협상 과정에서 밝힌 제안들은 그가 지닌 유리한 상황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관대한 것이었다.</ref> 원로원의 무례하고 경솔한 서간, 그리고 황제와 그 측근 신하들에 의한 거듭되는 배신에 알라리크는 분노했고, [[410년]]에 서고트군은 사상 최초로, 이 '영원한 도시' 로마를 함락시키고 사흘 간에 걸쳐 약탈을 자행했다.(게르만 족장으로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이어서 아피아 가도를 따라 남쪽으로 곡창(穀倉)인 [[아프리카]]로 전진하던 중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코센차]]에서 수난(水難)으로 급사하였다. 그는 죽음 직전까지 부족민들에게 안전한 땅을 찾아주지 못한 것을 괴로워했다고 전한다. 알라리크의 유해는 콘센티아 성벽 아래로 흐르는 부센티누스 강의 물길을 잠시 바꾼 다음 드러난 마른 강바닥 위에 부장품들과 함께 묻혔고, 알라리크의 부하들은 장례를 치르느라 잠시 바꾸어놓았던 물길을 원래대로 되돌린 뒤 공사에 동원된 모든 포로들을 살해했다고 한다. 무덤의 위치를 영원히 알리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 각주 ==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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