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집: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Rainbug (토론 | 기여)
Rainbug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5번째 줄:
 
== 생애 ==
=== 생애 초기 ===
[[1868년]](고종 5년) [[과거 (조선)|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광양 현감을 거쳐서 [[1880년]] 예조 참의로서 제2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58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 제국]]을 다녀와서, 서양 근대의 기술적 성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일본제국|일본]]의 문물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신사유람단]]의 일본 파견을 상주하게 하였다.
 
=== 일본 유람 ===
김홍집 일행은 [[1880년]] 7월 일본 기선 〈치토세 호〉 편으로 [[부산항]]을 통해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 체재 1개월 동안 이들은 일본 정부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일본의 근대화된 모습을 두루 살폈다. 그런 한편 일본의 감언이설과 유혹에 빠져들어 [[친일파]]로 변신하게 되었다. 이들은 수신사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고 일본 정부가 줄기차게 요구해온 바, 인천을 개항장으로 지정토록 하고, 일본 공사의 한성부 주재 등이 필요하다고 본국 정부에 품신하는 등 일본의 주구 노릇을 하기에 이르렀다.<ref> {{서적 인용
|저자=[[김삼웅]]
줄 16 ⟶ 18:
|id=ISBN 9788986072037
|페이지=37
}} </ref>
}} </ref> 김홍집은 귀국한 뒤 중국인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을 소개하여 개화 정책을 적극 추진케 한 공으로 예조 참판에 승진했으나, 개화를 반대하는 유학자들의 배척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책을 소개한 책임을 지고 사직했다.
 
=== 귀국과 정치 활동 ===
}} </ref> 김홍집은 귀국한 뒤 중국인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을 소개하여 개화 정책을 적극 추진케 한 공으로 예조 참판에 승진했으나, 개화를 반대하는 유학자들의 배척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책을 소개한 책임을 지고 사직했다.
 
그밖에 [[1882년]] 구미 열강의 통상 요구와 [[임오군란]]의 뒤처리 등 복잡한 문제에 부딪친 조선 정부에 다시 기용되었다. 전권대신 [[이유원]](李裕元)의 부관으로서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맺는 데 앞장서는 등 여러 나라와 수호조약(한미(韓美)·한영(韓英)·한독(韓獨) 등) 등을 맺을 때 유효적절한 수완을 발휘하여 ‘비오는 날의 나막신’에 비유되곤 하였다.<ref name="실록친일파"> {{서적 인용
줄 61 ⟶ 66:
 
== 김홍집을 연기한 배우 ==
* [[김세윤]] - [[1982년]] ( [[풍운]] ) [[MBC]] 드라마
 
== 참고 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