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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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6년]]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이야기를 듣고 [[몽유도원도]]를 그리자 이에 대한 찬시를 써서 헌정했다. [[1447년]] 중시(重試)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항상 임금의 측근에서 좋은 건의를 많이 하였다.
 
=== 정치 활동 ===
세종이 만년에 숙환으로 온천에 갈 때 성삼문과 [[박팽년]]·[[신숙주]]·[[최항 (조선 문신)|최항]]·[[이개]] 등을 항상 대동하고 고문으로 삼았다. [[1453년]]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세조)이 김종서(金宗瑞)를 참살하고 집현전 여러 신하들에게 정난(靖難) 공신의 호를 내리니 모두들 순번으로 축하연을 베풀었으나, 성삼문은 수치로 여기고 혼자만이 연회를 베풀지 않았다.
 
[[1455년]] 여름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 단종 복위 실패와 사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