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인 바이에른 여공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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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정보
[[파일:Marie in Bayern, Königin von Neapel.jpg|thumb|마리아 소피아]]
|이름 = 바이에른의 마리아 소피아
|원어이름 = Maria Sofia di Baviera
[[파일:|그림 = Marie in Bayern, Königin von Neapel.jpg|thumb|마리아 소피아]]
|그림제목 = 마리아 소피아(1859)
|작위 = 바이에른 공녀
|재위 = [[1841년]] [[10월 4일]] ~ [[1859년]] [[2월 3일]]
|작위2 = [[양시칠리아의 군주 배우자|양시칠리아 왕비]]
|재위2 = [[1859년]] [[5월 22일]] ~ [[1894년]] [[12월 27일]]
|전임자2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후임자2 = 왕정 폐지([[이탈리아 통일]])
|작위3 = 칼바리아 공작 부인
|재위3 = [[1859년]] [[2월 3일]] ~ [[1859년]] [[5월 22일]]
|전임자3 = [[스페인의 마리아 이사벨라]]
|후임자3 =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에타]]
|배우자 = [[양시칠리아의 프란체스코 2세|프란체스코 2세]]
|자녀 = 양시칠리아의 크리스티나
|본명 = ''Marie Sophie Amalie, Herzogin in Bayern''
|왕가 = 혼전:[[비텔스바흐 왕가]]<br />혼후:[[부르봉양시칠리아 왕가]]
|부친 =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요제프]]
|모친 = [[바이에른 공주 루도비카]]
|친척 = [[바이에른의 헬레네|투른-탁시스 후작부인 헬레네]]<br>[[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언니)
|출생일 = {{출생일|1841|10|4}}
|출생지 = {{국기|바이에른 왕국}} [[포센호펜 성]]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25|1|19|1841|10|4}}
|사망지 = {{국기|독일}} [[뮌헨]]
|매장지 = {{국기|이탈리아}} [[나폴리]] [[산타 키아라 성당]]
|종교 = [[로마 가톨릭]]
}}
 
'''바이에른의 마리아 소피아'''(Maria Sofia di Baviera, [[1841년]] [[10월 4일]] ~ [[1925년]] [[1월 19일]])는 [[양시칠리아 왕국]]의 왕 [[양시칠리아의 프란체스코 2세|프란체스코 2세]]의 왕비이다. [[단눈치오]]는 그녀를 가리켜 ''바이에른의 엄격한 작은 독수리''라고 표현했으며 [[마르셀 프루스트|프루스트]]는 ''[[가에타]] 요새의 전사여왕''이라고 불렀다.
 
== 생애 ==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요제프]]와 [[바이에른 공주 루도비카]]의 딸로 [[뮌헨]]에서 태어났다. 독일식 이름은 ''바이에른의 마리 조피 아말리에''(Marie Sophie Amalie in Bayern). [[바이에른의 헬레네|투른-탁시스 후작부인 헬레네]]나 오스트리아의 황후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는 그녀의 언니다.
 
[[1859년]] [[2월 3일]] 마리아 소피아는 양시칠리아의 왕태자인 프란체스코와 결혼했고 그 해에 시아버지 [[양시칠리아의 페르디난도 2세|페르디난도 2세]]가 서거함으로써 그녀는 양시칠리아의 왕비가 되었다. [[1860년]] 9월, [[가리발디]]가 이끄는 군대가 수도 [[나폴리]]를 덮쳤고, 국왕 부부는 나폴리에서 북쪽으로 8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요새 [[가에타]]에 주둔했다. 이듬해 초까지 이어진 공방전에서 마리아 소피아는 군사들을 사기를 독려하고 손수 부상자들을 살피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에타 요새는 함락되었고 [[로마]]로 망명한 부부는 유럽 각국과 연락을 취하며 왕국의 부활을 꾀했다. 그러나 [[1870년]] 두 사람이 머무르고 있던 로마 또한 이탈리아에 병합되었고 부부는 다시 망명을 떠나야 했다. [[1894년]] 프란체스코가 죽은 뒤에도 그녀는 파리에서 왕정 복고를 노렸다. [[1900년]] 일어난 [[움베르토 2세]]의 암살 사건에 그녀가 관련되어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제1차세계대전]] 중에도 그녀는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편에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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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녀 ==
그녀는 결혼 이후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고 로마에 체류하던 중 [[벨기에]] 출신의 남작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으나 스캔들을 염려한 친정 식구들은 그녀로부터 딸을 격리시켰다. 마리아 소피아는 그 뒤 프란체스코와의 사이에서 딸 크리스티나를 낳았지만 석 달만에 죽었다.
 
{{전임후임
|직책 = [[양시칠리아의 군주 배우자|양시칠리아 왕비]]
|임기 = [[1859년]] [[5월 22일]] ~ [[1861년]] [[3월 20일]]
|전임자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후임자 = 왕정 폐지([[이탈리아 통일]])
}}
{{전임후임
|직책 = ''명목상의''<br />[[양시칠리아의 군주 배우자|양시칠리아 왕비]]
|임기 = [[1861년]] [[3월 20일]] ~ [[1894년]] [[12월 27일]]
|전임자 = -
|후임자 =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에타]]
}}
 
[[분류:1841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