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3세 (스페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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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왕=[[카를로스 4세]] (스페인)<br />[[페르디난도 1세 (양시칠리아)|페르디난도 4세/3세]] (나폴리와 시칠리아)<br />[[카를 6세|카를로 2세]] (파르마)
|부왕=[[펠리페 5세]]
|모비=[[이사벨 파르네시요파르네시오]]
|목록=[[스페인의 군주|스페인의 왕]]<br />[[나폴리의 군주|나폴리의 왕]]<br />[[시칠리아의 군주|시칠리아의 왕]]<br />[[파르마의 군주|파르마와 피아첸차의 공작]]
}}
 
== 이탈리아 시절 ==
카를로스는 [[1716년]] [[1월 20일]] [[스페인]]의 왕 [[펠리페 5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파르마 공국]]의 [[이사벨 파르네시오]] 사이에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모계 계승으로 16살인 [[1731년]] [[파르마의 군주|파르마]] 공작이 되었고, 이로 인해서 [[스페인]]에 있는 것에 비해 지적 영향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1734년]] 카를로스는 [[폴란드 왕위계승전쟁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여 [[나폴리 왕국|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시칠리아]]를 정복하여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카를로스는 군사 관련 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왕위 계승 전쟁]]에는 [[지중해]]의 [[영국 해군]]의 [[나폴리]] 공격 위험에 의해서 중립을 지킬 수밖에 없었는데, 이로 인하여 카를로스는 영국에 대해서 큰 위협을 느끼고, 이는 이후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나폴리 왕국|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시칠리아]]의 왕으로서, 카를로스는 이후 그가 [[스페인]]에서도 진행하게 되는 개혁을 시작하였다. 카를로스는 타고난 재능은 많지 않지만 왕으로서의 임무를 다 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훌륭한 각료진을 두었다. [[나폴리 왕국]]의 각료인 [[베르나르도 타누치]]는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 스페인 왕 ==
=== 대외 관계 ===
[[1759년]] 카를로스의 배다른 형제이자 [[스페인]] 국왕인 [[스페인의 페르난도 6세|페르난도 6세]]가 사망하자 카를로스는 스페인의 왕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카를로스는 [[나폴리 왕국|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시칠리아]] 왕위를 그의 셋째 아들인 페르난도(이후 양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으로서 [[페르디난도 1세 (양시칠리아)|페르디난도 1세]]가 된다.)에게 물려주었다. 스페인 왕으로서의 외교 정책은 결코 좋지 못했다. [[영국]]에 대한 적개심과 [[부르봉 왕가]]의 일원이라는 의식은 [[1760년]] [[작센]]의 왕 [[프레데리크 아우구스투스 2세]]의 딸이자 자신의 아내인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마리아 아말리아]]의 사망 이후 더 커졌는데, 이는 스페인이 [[프랑스]]와 함께 [[부르봉 왕가 협정]]을 체결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로 인해 스페인은 [[7년 전쟁]]에 얽매였고 이는 스페인에 큰 손해를 끼쳤다. [[1770년]]에는 [[포클랜드 제도]]를 두고 영국과의 전쟁 위기가 있었다. [[1779년]]에는 미국의 독립이 스페인 식민 제국을 뒤흔들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독립 전쟁]]에서 영국에 대항하여 [[프랑스]]와 미국 독립군을 지원하였다. 카를로스는 스페인 육군에 대해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해군 역시 약간의 배 건조를 제외하고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 내부 개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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