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3·1절 발포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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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은 3·1기념 제주도대회가 좌익의 주도로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 촉구와 조직의 정비라는 목표로 열리게된다는 것을 알고 시가행진을 허가하지 않고 행사장소도 제주서비행장으로 하라고 했지만, [[제주북국민학교]] 주변엔 좌익이 동원한 [[남로당]], [[민주주의민족선선]], [[민주주의청년동맹]], [[부녀동맹]], [[인민위원회]]에서 동원한 17,000명의 군중과 기타군중 8,000명 등 총 3만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경찰은 제주 경찰 330명과 육지에서 파견된 응원 경찰 100명 등 430명으로 주변 경비 활동을 하였다.<ref name="제주31">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2003) 107~109쪽. </ref><ref name="강준만 20">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0~21쪽</ref>
행사를 끝낸 군중은 가두 시위에 들어갔는데, 이때에 기마 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 경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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