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하마드 아슬람 와탄자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WikitanvirBot (토론 | 기여) 잔글 r2.7.1) (로봇이 바꿈: ru:Ватанджар, Мохаммад Аслам |
편집 요약 없음 |
||
1번째 줄:
'''모하마드 아슬람 와탄자르'''(Mohammad Aslam Watanjar, [[1946년]] ~ [[2000년]])는 [[아프가니스탄]] [[장교]]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무함마드 다우드]]를 죽이고 공산정권을 수립한 [[1978년]]의 쿠데타 [[
[[팍티아 주]]의 [[주물라]] 출신의 [[파슈툰족]] 출신으로, 수도 [[카불]]의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소련]]에서 기갑장교로 훈련을 받았다. [[1978년]]의 공산 쿠데타인
쿠데타 중 지상군 지휘관으로 그의 부대는 수도 일원을 장악했고, 공군 출신의 [[압둘 카디르]] 대령은 왕궁에 대한 공격을 주도해 [[무함마드 다우드]] 대통령을 살해했다. 와탄자르 대령은 또한 [[카불 라디오]]를 통해 [[파슈토어]]로 [[압둘 카디르 다가르왈]] 대령을 위원장으로 하는
[[4월 27일]] 저녁에 발표된 혁명평의회의 첫 강령에는
쿠데타 직후, 와탄자르는 부총리 겸 통신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후에 그는 아민에 대한 음모에 합류할 때까지 내무, 국방, 그리고 다시 내무장관으로 내각에서 일했다. [[헤라트]] 봉기는 아프간 정권의 내부 권력투쟁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군 지도부의 형편없는 업무능력을 개선하기 위해,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는 와탄자르에게 결국 국방장관의 직위를 맡겼다. 국방부를 장악하려는 와탄자르의 행동은 군의 붕괴 후 아민의 약점을 파고드는 눈에 띄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1979년 7월 아민은 국방위원회를 접수하고 타라키의 동조자로 몰아 그를 교체했다.
이후 하피줄라 아민 총리에 대한 음모를 꾸미던 [[사르와리]], [[굴라브조이]] 등 다른 [[할크]]파 간부들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가즈니]] 출신이던 사르와리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은 [[팍티아 주]] 출신이었다. 그들은 팍티아 출신의 장교가 상당히 많았던 군에 영향력이 있었다. 처음에는 아민의 가까운 동료였으나 그들운 후에 그에 반대하여 아민에 반대하는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 대통령 편으로 돌아섰다. 아민이 그들을 몰아내자, 사르와리 및 굴라브조이와 함께 그들은 소련 대사관으로 망명했다.
줄 15 ⟶ 13:
소련군과 함께해 귀국한 사르와리, 와탄자르, 굴라브조이는 아프간 군이 침공에 대항하지 않도록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그들과 함께 와탄자르는 소련군을 안내했다. 소련군의 침공 이후, 그는 중앙위원회 및 '''혁명평의회''' 위원이자, 통신장관 직을 맡았다.
[[1981년]] 6월에는 정치국에도
[[아흐마드 샤 마수드]]의 무자헤딘 군대가 수도로 진입했을 때 그들은 정부군으로부터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마수드와 내통하고 있었다. 반면 경쟁 무자헤딘 파벌을 이끌던 [[굴부딘 헤크마티아르]]는 내무장관 [[라즈 모하마드 파크틴]]과 국방장관 모하마드 아슬람 와탄자르 소장을 포함한 전 정권의 일부 파슈툰 강경파들의 지지를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