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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homas Hunt Morgan.jpg|섬네일|1891년의 토머스 헌트 모건{{노벨상 딱지}}]]
'''토머스 헌트 모건'''({{llang|en|ThpmasThomas Hunt Morgan}}, [[1866년]] [[9월 25일]] ~ [[1945년]] [[12월 4일]])은 [[미국]]의 [[생물학|생물학자]]로,
[[초파리]]에서의 유전적 전달 메커니즘을 발견하여, [[1933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 어린 시절과 대학 생활 ==
모건은 [[1866년]] [[미국]] [[켄터키 주]]의 [[렉싱턴]]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찰튼 헌트 모건]]은 영사였으며, 숙부인 [[존 헌트 모건]]은 [[남북전쟁]] 동안 [[남부동맹]]군의 장군이었다. 모건은 어릴 때부터 자연사에 흥미를 보였다. [[1886년에]]는 후에 [[켄터키 대학대학교]] 된 [[켄터키 대학대학교|켄터키 주립 대학대학교]]에서 [[동물학]]으로 학사학위를 받았으며, 그 뒤 [[존스홉킨스존스 대학홉킨스 대학교]]에 들어가 [[생물학]]으로 대학원 과정을 밟았다. [[존스홉킨스존스 대학홉킨스 대학교]]에서는 [[형태학|형태학자]]이자 발생학자인[[발생학|발생학자]]인 [[윌리엄 키스 브룩스]] 밑에서 공부했으며, [[1890년]]에 박사학위를 받은 뒤 [[브린모어 대학대학교]]의 교수가 되기까지 1년 간 그곳에서 지냈다.
 
== 발생학 실험 ==
[[1893년]]에 모건은 발생학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험적 방법을 적용했다. 그는 발생과정에서 일어나는 인과적 사건들을 밝혀내기 위해 할구(초기 배세포)에서 배가 형성되는 문제, [[유핵난세포]]와 [[무핵난세포]]의 수정문제 등을 검토했다. [[1904년]] [[브린모어 대학대학교]]에서 자신이 가르치던 대학원생인 샘슨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탁월한 세포학자이자 발생학자였다결혼하였다. 같은 해 컬럼비아대학교의[[컬럼비아 대학교]]의 [[실험동물학]] 교수직을 받아들여 그 뒤 24년간에 걸쳐 중요한 유전적 연구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했다.
 
[[19세기]] 말에 활동하던 대부분의 [[발생학|발생학자]]나 많은 [[생물학|생물학자]]들이 그렇듯이 모건도 [[자연선택|다윈의 진화론]]은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생물체의 복잡한 적응 현상을 사소하고 우연적인 변이가 축적되어 생기는 것으로 생각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이 [[찰스 다윈|다윈]]은 초기의 가설적 이론인 [[판게네시스]]를 제외하고는 변이의 기원과 전말을 설명하는 유전 메커니즘을 전혀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모건은 진화 그 자체는 사실이라고 믿었으나, 실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으므로 [[찰스 다윈|다윈]]이 제시한 [[자연선택]]의 메커니즘은 불완전한 이론이라고 보았다. 모건은 멘델의 이론과 염색체설에 대해서 아주 다른 형태로 반대했다. 위의 두 이론은 세포 안에 발생과정을 조절하는 어떤 유전적 단위나 물질적 실체가 있다고 가정하여 이를 가지고 생물학적인 현상을 설명하려고 했으나, 그에게 있어 이러한 이론은 18세기와 19세기 초기 발생학을 좌우한 [[전성설]](난자와 정자 내에 완전하게 자란 성체가 축소된 형태로 들어 있다는 학설)과 아주 흡사한 것일 뿐이었다. 그는 [[염색체]]가 유전현상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였으나, [[염색체]] 하나하나가 특정한 유전형질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1909년]]부터 1년간 주장했다. 또한 그는 [[멘델의 유전법칙|멘델의 이론]]이 순전히 가설적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멘델의 이론이 교배의 결과를 설명하고 심지어 예측까지 할 수 있다고 해도 유전이 이루어지는 정확한 과정을 설명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각각의 [[염색체 분리|염색체 쌍이 분리되는 것]]과 각각의 [[염색체]]가 멘델주의자들의 설명대로 서로 다른 난자와 정자로 들어간다는 것만으로 두 과정이 서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가 보기에는 증거가 충분하지 못한 것이었다.
 
== 초파리연구초파리 연구 ==
모건은 [[1908년]]부터 [[초파리]]의 교배를 통한 연구를 시작했다. 1909년 자신이 기르던 초파리 중에서 작지만 불연속적인 변이, 즉 수컷 1마리가 흰눈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모건은 이 초파리를 정상(눈이 붉음)인 암컷과 교배시켰는데, 그 결과 나온 초파리(F1)는 모두 붉은 눈을 하고 있었다. 다시 F1의 초파리들끼리 교배를 시켰더니 제2대(F2)의 초파리들 중 몇몇은 흰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수컷이었다. 이 신기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모건은 한성(반성) 형질에 대한 가설을 세웠으며, 이러한 형질은 암컷의 [[X염색체]]의 한 부분이 발현되는 것이라고 추정했다. 다른 유전적 변이 중에서도 많은 경우가 반성으로 밝혀졌는데, 일반적으로 [[반성 형질]]들은 모두 함께 유전되므로 [[X염색체]]가 여러 개의 유전적 단위나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덴마크]]의 [[식물학|식물학자]] [[빌헬름 요한센]]이 [[1909년]]에 도입한 유전자 개념을 채택하고, 유전자는 염색체 위에 일직선으로 배열되어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교배실험과 [[세포학]] 상의 증거를 보고 [[멘델의 유전법칙|멘델의 이론]]과 [[염색체설]]이 모두 설명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모건은 두 이론에 대한 회의를 버림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더욱 높일 수 있었다.
 
[[컬럼비아 대학]] 출신들인 [[스터티번트]], [[브리지스]], [[멀러]] 등과의 공동 연구를 통해 모건은 초파리 연구를 포괄적인 유전이론으로 발전시켰다. 이 연구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멘델주의자들이 말하는 유전자가 선상의 염색체 '지도'에서 특정한 위치에 놓일 수 있음을 보인 것이다. 그는 세포학적인 연구를 계속하여 지도상의 위치가 염색체상의 실제 위치와 정확히 일치됨을 보였으며, 이는 멘델의 유전요소가 염색체 구조에 물리적 토대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1915년 모건·[[스터티번트]]·[[브리지]]·[[멀러]] 등은 이 연구의 초기 결과를 요약한〈멘델 유전의 메커니즘 The Mechanism of Mendelian Heredity〉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1916년 무렵에는 모건도 다윈 이론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1928년 그는 [[캘리포니아 공과 대학대학교]]에 생물학과를 개설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또한 그 대학의 생물학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코로나 델 마르]]에 해양연구소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 뒤 그는 박사과정에 있는 사람 및 대학원생들을 포함한 그의 동료들과 함께 계속해서 염색체 유전설의 여러 면을 정교하게 발전시켜 나갔다. [[컬럼비아 대학대학교]]에서의 연구생활을 끝낼 무렵부터 [[캘리포니아 공과 대학대학교]]으로 옮긴 뒤 한동안은 초파리 연구에서 벗어나 초기의 관심사였던 [[실험발생학]]을 연구했다. 유전학과[[유전학]]과 발생[[발생학]] 사이에 이론적 연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그 연결을 명백히 보이고 그에 대한 실험적 증거를 제시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 수상 ==
[[1924년]] 모건은 [[다윈 메달]]을 받았다.받았으며, [[1933년]]에는 [[초파리]]에서의 유전적 전달 메커니즘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또한 1939년에는 그가 외국인 회원으로 소속되어 있던 런던의 [[왕립학회]]에서 [[코플리 메달]]을 받았다. [[1927년]]에서 [[1931년]]까지 [[미국 과학 아카데미]]의 회장을 지냈으며, [[1930년]]에는 [[미국 과학진흥협회]] 회장, [[1932년]]에는 제6차 [[국제유전학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1945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캘리포니아 공과 대학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