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메뉴 열기

바뀜

크기가 바뀐 것이 없음, 8년 전
편집 요약 없음
 
=== 동서 분당 ===
{{참고|정여립의 난|기축옥사}}
[[1589년]]의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때 [[동인]]인사 2000명이 학살되자 [[동인]]은 위관인 [[좌의정]] [[정철]]과 그의 스승 [[성혼]]에게 원한과 앙심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1591년]] 서인 [[정철]]이 물러날 때 [[북인]]의 책동으로 그도 함께 삭직당했다. 우성전과 [[유성룡]]은 정승을 지낸 인물이라 처형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산해]], [[정인홍]] 등은 옥사의 위관으로 이발의 팔순 노모와 10세도 안된 어린 아들들을 장살시킨 가혹함을 지적하였다.
 
=== 임진왜란과 죽음 ===
다시 복권되어 수원 현감으로 근무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에서 의병 2000명을 모집해 추의군(秋義君)이라 칭하고 [[강화]]에서 의병장 [[김천일]]의 휘하로 들어가 각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행주에서는 권율(權慄)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후 성균관 대사성 겸 지제교로 특전되었으나 계속 의병장으로 활약해 후퇴하던 왜군을 [[의령]]까지 쫓았으나 병을 얻어 경기도 부평으로 후송된 뒤 죽었다.
 
[[경기도]] 행주에서는 도원수 [[권율]](權慄)의 후방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후 성균관 대사성 겸 지제교로 특전되었으나 계속 의병장으로 활약해 후퇴하던 왜군을 [[의령]]까지 쫓았으나 병을 얻어 경기도 부평으로 후송된 뒤 죽었다. 당시 그의 향년 51세였다.
 
=== 사후 ===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숙곡리에 부인 양천 허씨 묘소 옆에 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1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뒤 [[북인]]의 집권으로 그의 공적은 잊혀졌고, [[1623년]]의 [[인조 반정]]으로 [[북인]]이 몰락한 뒤에는 [[서인]]과 [[노론]]이 집권하였으므로 재조명받지 못하였다. 그뒤 정조 때에 가서 [[증직|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예문관 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충강(忠康)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 가족 ==
== 참조 ==
<references/>
 
== 관련 항목 ==
* [[정여립의 난]]
* [[기축옥사]]
* [[임진왜란]]
* [[이이]]
* [[성혼]]
* [[이산해]]
* [[정여립]]
* [[유성룡]]
 
{{토막글|한국 사람}}
[[분류:조선의 군인]]
[[분류:조선의 의병장]]
[[분류:임진왜란 관련자]]
[[분류:병사한 사람]]

편집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