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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다우드'''([[1909년]] [[7월 18일]] ~ [[1978년]] [[4월 28일]])는 [[아프가니스탄]]의 [[총리]]([[1953년]] ~ [[1963년]])이자, [[아프가니스탄]]의 초대 [[대통령]]([[1973년]] ~ [[1978년]])이자, 아프가니스탄 왕족의 한 사람으로, [[무함마드 자히르 샤]]의 사촌형제이다.
 
[[1953년]] [[사르다르 샤 마흐무드 칸]]이 해임되면서 총리가 되었고 이후 10년 동안 독단적인 개혁 정치를 주도해 소련과의 관계를 긴밀히하며 여러 공공 사업을 벌였다. 하지만 [[1961년]]부터 시작된 [[파키스탄]]과의 갈등 등으로 인해 민심과 경제가 악화되면서 [[1963년]] 해임되었다.
[[1953년]]에 총리가 됐다. 다우드는 [[소비에트 연방]]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파키스탄]]과는 거리를 두려고 했다.
 
[[1973년]] 7월 자히르 샤가 국외 순방 중일 때 아프가니스탄 공산파의 [[할크]]와 협력해 쿠테타를 일으켜 초대 대통령이 됐다.되었고 아프가니스탄의 라디오를 반파키스탄 방송으로 채웠으며, 소련과 미국에게서 개발 원조를 기대했다. 하지만 이슬람 세력을 탄압해 이후 무자헤딘 지도자가 된 [[부르하누딘 랍바니]],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등 여러 수가 파키스탄으로 망명했다.
 
[[1977년]] 단일 정당만을 허용하는 새로운 공화정 헌법을 통과시키고 다우드는 6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다시 재직했다. 이 무렵 다우드는 점차 다른 공산파인 [[파르참]]이나 소련과는 거리를 두면서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1978년]] [[아프가니스탄 인민 민주당]](PDPA)의 유력 당원인 [[미르 아크바르 카이바르]]가 정부에 의해 살해되자, 인민 민주당 지도자들은 다우드가 자신들을 모조리 몰아낼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두려워했으며, 과연 그 직후에 지도부 상당수가 정부에 체포됐다. [[하피줄라 아민]]과 인민 민주당의 군부 인사들은 건재해 반란을 도모했다.
 
[[1978년]] [[4월 17일]] 파르참 지도자이자 [[아프가니스탄 인민 민주당]](PDPA)의 유력 당원인 [[미르 아크바르 카이바르]]가 정부에 의해 살해되자,살해되고 시민들에 의한 반미 시위가 일어났다. 인민 민주당 지도자들은 다우드가 자신들을 모조리 몰아낼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두려워했으며, 과연 그 직후에 지도부[[4월 상당수가26일]] 정부에 체포됐다.~ [[하피줄라4월 아민27일]] 인민걸쳐 민주당의지도부 군부상당수가 인사들은정부에 건재해 반란을 도모했다체포됐다.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 [[바브락 카르말]], [[하피줄라 아민]], [[모하마드 아슬람 와탄자르]] 등이 이끄는 인민 민주당의 [[4월 혁명|쿠데타]]로 정권이 전복당하자, 다우드는 가족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하지만 하피줄라 아민과 인민 민주당의 군부 인사들은 건재해 반란을 도모했고 결국 [[4월 27일]]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 [[바브락 카르말]], [[하피줄라 아민]], [[모하마드 아슬람 와탄자르]] 등 이전 쿠데타를 이끈 인민 민주당의 할크파와 군부 세력이 [[사우르 혁명]]을 일으켜 정권이 전복시켰다.
 
다우드는 [[4월 28일]] 대통령궁을 포위한 혁명군과 수비대 간의 전투 와중에 가족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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