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우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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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보수 [[기독교]]계의 반공주의는 [[1920년]]대부터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ref> 《[[기독교사상]]》2006년 4월호, '한국교회와 과거사 고백-민주화시대이후의 한국교회', p.199 </ref>1920년대 [[조선]]에는 [[사회주의]]가 새로운 이념으로 들어오는데,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인]]들은 [[미신]]에 빠져 있으며, 항일의식을 약화시킨다. 또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ref>
[http://100.naver.com/100.nhn?docid=328799 네이버 백과사전의 반기독교운동 설명] </ref>라면서 [[기독교인]]들의 잘못을 비판했다. 이에 대해 한국 기독교는 [[사회주의자]]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이끌고, 교회 스스로 잘못을 반성하는 교회개혁을 하기보다는 그들을 배척하였다.<ref> 《기독교사상》[[2006년]] 4월호, '한국교회와 과거사 고백-민주화시대이후의 한국교회', p.199 </ref>사실 이러한 비판은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모습만 지적한 편견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한국 기독교에도 비판의 빌미를 제공한 책임이 있다. 1920년대 한국교회는 [[농촌]][[경제]]가 무너지는등의 [[사회]]문제에 대해 무관심하여, 이에 실망한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 [[사회주의자]]가 되는 일이 많았다.뿐만 아니라, [[선교사]]들도 [[도덕]]적인 수준이 낮아서, 폭언, 구타, [[성추행]] 등의 물의를 일으켜, [[구세군]] 사관학교, [[정명여학교]] 등의 [[기독교]]학교에서 [[선교사]] 배척운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심지어는 허시모 사건이라고 해서 미국 [[안식교]] 선교사 허시모(C.A Haysmer)가 [[1925년]] 9월 [[과수원]]에 들어와 [[사과]]를 훔친 [[어린이]]의 양쪽 볼에 [[초산은]]으로 도적이라고 쓰는 바람에, 허시모 자신은 [[재판]]을 받고, [[언론]]에서는 선교사들의 [[백인우월주의]]를 비판했다.<ref> 《기독교사상》[[2005년]] [[9월]]호, '선교의 역사적 반성과 오늘의 방향성 모색' p.54 </ref> 지식인들도 당시 한국교회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문인 [[이광수 (1892년)|이광수]]는 1920년 《금일 조선예수교회의 문제점》에서 다음과 같은 비판을 한다.
{{인용문2|
#조선[[교회]]는 너무 권위적이고 계층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