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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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llang|fr|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 [[1768년]] [[9월 4일]] ~ [[1848년]] [[7월 4일]])은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외교 정치가이다.
 
프랑스의 [[생 말로]]에서 브르타뉴 지방의 오래된 귀족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루소]], [[존 밀턴|밀턴]]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 왕당적 전통주의자가 되었다. 화려하고 섬세한 정열을 가진 문체로서, 서정적인 작품으로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1787년에는 형의 장인인 말세르브의 도움으로 [[루이 16세를16세]]를 알현하게 되고 사교계에 데뷔해 자유분방한 생활을 시작했다. 1791년에 아메리카 대륙을 여행하게 되는데, 이는 훗날 저술의 밑바탕이 되는 중요한 경험이었으며<ref>《아탈라》, 《르네》를 썼는데, 이것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함께 후세 문학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ref>, 1792년에는 셀루타의 모델이 되기도 한 셀레스트와 결혼을 했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때 반혁명군에 참가하였다가 1793년부터 영국에서 혹독한 망명 시절을 보냈다. [[나폴레옹 1세의1세]]의 후대로 로마 공사를 지내기도 했으나, 후에는 불화로 평생을 적대시하였다.
 
파리로 돌아온 후 1801년에 ≪아탈라≫를, 1802년에는 나폴레옹의 보호 아래에서 ≪르네≫가 수록된 ≪기독교의 정수≫를 발표했다. 이 작품들의 대성공으로 인해 샤토브리앙은 프랑스 낭만주의의 시작을 화려하게 알렸다. 이어서 1809년에 ≪순례자들≫, 1826년에 ≪[[나체즈 족]]≫이 포함된 ≪전집≫을 발간하고 1844년에는 ≪랑세의 삶≫을 출판했다. 샤토브리앙은 그 후 ≪무덤 너머의 회상≫을 30여 년에 걸쳐 집필했다. 또한 샤토브리앙은 왕정파의 일원으로서 두 번의 장관직과 영국 대사를 비롯한 세 번의 대사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1848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루이 16세 치하,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 치하, 왕정복고 등의 극심한 정치적·사회적 변화 속에서 정치가로, 작가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샤토브리앙처럼 될 것,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빅토르 위고가위고]]가 말했을 정도로 당대의 젊은이들과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 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