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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 인종|인종]]이 죽고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에 매형인 계림군이 [[윤임]]에 의해 추대받았다는 이유로 매형인 계림군은 역모죄로 붙잡혀 처형을 당하고, 그의 맏형은 곤장을 맞고 [[전라남도]] [[광양군]]으로 유배되었으며, 아버지 [[정유침]]은 [[함경북도]] [[정평]]으로 유배된다. 그 역시 [[계림군]]의 처가 일족(一族)으로서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유배될 때 정평으로 따라간 이후, 아버지의 배소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곧 아버지 정유침은 유배가 풀려서 되돌아왔다.
 
그러나 [[1547년]](명종 2년) [[전라도]] 양재역에서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관련자로 지목되어 아버지 [[정유침]]은 [[경상북도]] [[영일]]로 유배되었으며, 맏형은 다시 붙잡혀와 형문을 당하던 중 곤장을 맞고 [[함경북도]] [[경원]]으로 귀양가는 길에 형독으로 32살의 나이에 장살했다. 이후 그의 둘째 형 정소는 과거를 준비하다가 벼슬길에 환멸을 느껴 처가가 있는 [[전라남도]] [[순천]]으로 은거하였다. 그는 다시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를 전전하게 된다.
그러나 [[1547년]]
(명종 2년) [[전라도]] 양재역에서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관련자로 지목되어 아버지 [[정유침]]은 [[경상북도]] [[영일]]로 유배되었으며, 맏형은 다시 붙잡혀와 형문을 당하던 중 곤장을 맞고 [[함경북도]] [[경원]]으로 귀양가는 길에 형독으로 32살의 나이에 장살했다. 이후 그의 둘째 형 정소는 과거를 준비하다가 벼슬길에 환멸을 느껴 처가가 있는 [[전라남도]] [[순천]]으로 은거하였다. 그는 다시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를 전전하게 된다.
 
==== 수학과 청년기 ====
정언신이 체포되자 정언신의 아들 율이 상소를 올려, "제 아비는 여러 해 동안 정여립과 왕래가 없었습니다." 라고 무죄임을 주장하고, 성혼도 정철에게 편지를 보내 대신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된다고 권고하므로 죄를 감해주었다.<ref name="deok100"/> 그러나 조사 결과 정여립의 문서와 서신들을 조사했을 때 정언신의 편지가 비교적 많이 들어 있었고, 정언신에게는 유배형을 내린다.
 
서인들은 이발의 가족들이 옥사할 당시 위관은 정철이 아니라 [[유성룡]]이라고 주장했는데<ref name="yu01">정철은 선조 24년(1591) 윤3월에 파직되었고, 유성룡은 같은 해 4~5월경의 위관이었다. 오항녕, 《조선의 힘》, 역사비평사, 2010.2.15, p.274 ~ 275</ref><ref>오항녕 (충북대학교 우암연구소),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367319.html ‘십만양병설 조작’ 주장은 ‘율곡전서’ 판본 무지서 비롯], 《한겨레》, 2009.7.22</ref>, [[남인]]들은 [[서인]]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비열한 정치공세로 이해하고 원한과 의혹을 한층 더 쌓게 되었다.
 
[[기축옥사]] 처결을 지휘한 공로로 그는 추충분의협책평난공신(推忠奮義恊策平難功臣) 2등관에 녹훈되었다.
같은 [[서인]]이었던 예학자 [[김장생]](金長生)은 그가 정여립의 옥사를 조작한 인물이라며 의혹을 제기했다. [[김장생]]에 의하면 정철은 [[정여립의 옥사]]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형문장의 추국관이 되기를 자청했다 한다.
 
[[김장생]]이 엮은 〈송강행록〉(松江行錄)에 의하면, 기축옥사 당시 [[정철]]의 행적을 의심하였다. [[김장생]]에 의하면 정여립 등이 모반한다는 고변이 있자 일반인은 그의 상경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정철은 그의 도망을 미리 알고 있었으며, 자진하여 옥사처리를 담당했다는 것이다.<ref name="nate1">[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78525&v=44 정여립],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f> 이에 따라 그가 [[정여립]]의 도망을 미리 안 이유는 정철이 정여립의 유인과 암살을 지령한 음모의 최고지휘자일수도 있다{{출처}}<ref name="nate1"/>는 것이다. 한편 당시 위관은 [[유성룡]]으로 그와는 무관하다는 견해도 있다.<ref name="yu01"/>
 
[[기축옥사]] 당시 80명의 [[동인 (정치)|동인]]인사들을 체포하여 형문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1천여 명의 동인계열 인사와 가족들이 체포되어 형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서인의 영수로서 형문의 초기 책임자였던 그는 옥사를 확대시켰다는 비판을 받았고, 그에 대한 동인의 원한과 감정은 극에 달하였다.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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