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Coskastum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Coskastum (토론 | 기여)
104번째 줄:
 
이때 위관 중의 한사람인 [[정언신]]이 [[정여립]]의 친족이라는 이유로 삭직되고 그가 이듬해 [[2월]]에 [[좌의정]]이 되었으며, 동시에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좌의정]]이 되면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주도적으로 다스리게 되자 서인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 세력을 추방했다. [[기축 옥사]]의 처결 과정에서 그는 다른 [[동인]]들까지도 엮어서 [[동인]]에 대한 일망타진을 계획한다. 그러나 형장의 참혹함과 [[이발]]의 80대 노모와 어린 아들까지 처형당하는 것을 목격한 [[이산해]]와 [[윤선도]] 등은 이 사건을 계기로 그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
 
다음해 다시 좌의정에 올랐으나, [[1591년]](선조 24년) [[건저 문제]]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ref>동인인 영의정 [[이산해]]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게 되었다. 이때 선조는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 했었다.</ref> 파직되어 명천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이산해]]는 그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기로 약속하고는 [[인빈 김씨]]의 친정오빠 [[김공량]]을 찾아가 정철이 인빈과 [[신성군]]을 죽이려 한다고 고하였다. [[김공량]]이 이를 [[인빈 김씨]]에게 전하고 [[인빈 김씨]]는 [[조선 선조|선조]]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선조는 인빈 김씨에게 빠져 있던 터라 그녀의 소생인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고 말았다. [[동인]]계 언관들은 그를 계속 공격했고, [[조선 선조|선조]]는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며 그를 질타했다.
 
이때 [[동인]]이었던 [[이산해]]는 그를 사형에 처할 것을 여러번 건의하였으나 [[조선 선조|왕]]이 듣지 않아 실패한다. 명천에서 다시 [[경상남도]] 진주(晉州)로 배소가 옮겨져 이배(移配)되었다가, 이어 다시 [[평안북도]] 강계(江界)로 재 이배되었다. [[강계]]로 배소가 옮겨진 뒤 [[동인]]들의 거듭된 탄핵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에 처해졌다.
 
==== 동인 축출 계획 ====
줄 122 ⟶ 116:
 
[[기축옥사]] 처결을 지휘한 공로로 그는 추충분의협책평난공신(推忠奮義恊策平難功臣) 2등관에 녹훈되었다.
 
=== 생애 후반 ===
==== 파직과 유배 ====
다음해 다시 좌의정에 올랐으나, [[1591년]](선조 24년) [[건저 문제]]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ref>동인인 영의정 [[이산해]]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게 되었다. 이때 선조는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 했었다.</ref> 파직되어 명천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이산해]]는 그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기로 약속하고는 [[인빈 김씨]]의 친정오빠 [[김공량]]을 찾아가 정철이 인빈과 [[신성군]]을 죽이려 한다고 고하였다. [[김공량]]이 이를 [[인빈 김씨]]에게 전하고 [[인빈 김씨]]는 [[조선 선조|선조]]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선조는 인빈 김씨에게 빠져 있던 터라 그녀의 소생인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고 말았다. [[동인]]계 언관들은 그를 계속 공격했고, [[조선 선조|선조]]는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며 그를 질타했다.
 
이때 [[동인]]이었던 [[이산해]]는 그를 사형에 처할 것을 여러번 건의하였으나 [[조선 선조|왕]]이 듣지 않아 실패한다. 명천에서 다시 [[경상남도]] 진주(晉州)로 배소가 옮겨져 이배(移配)되었다가, 이어 다시 [[평안북도]] 강계(江界)로 재 이배되었다. [[강계]]로 배소가 옮겨진 뒤 [[동인]]들의 거듭된 탄핵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에 처해졌다.
 
=== 임진왜란과 최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