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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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래 ==
춘추라는 책이름은 일년을 춘하추동으로 나누어 역사를 기록하였기에 나온 이름이다. 참고로 글자 한자 한자에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기에 유교와 중국 역사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면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를 만큼 어렵다. 모르고 읽으면 지겨울 만큼 간단한 역사기록일 뿐이지만 글자 한자한자에 담겨진 뜻을 알면 공자가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에 얼마나 엄중했는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다른 나라와 싸울때도 대의명분이 있는 전쟁과 아닌 전쟁을 구별하여 달리 표기하였다. 왕위에 오를 때도 정통성이 있는 왕과 아닌 왕을 구별하였다.
 
== 저작 연대 ==
전통적으로 유교에서는 춘추의 저자가 공자였다고 전해진다. 다만 시대에 마다 달리 주장하여 한결같지 않다.
최초로 공자가 춘추를 지었다고 말한 사람은 [[맹자]](孟子)이다. 맹자는 요(堯)임금으로부터 현재까지의 혼란 했던 역사를 말하고, 주나라의 쇠퇴하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공자가 춘추를 만들었고, 그 문장에는 역사가 기록되어있지만, 그 문장에도 공자의 이상인 도리를 나타냈다고 한다.
[[전한]](前漢)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 (역사서)|사기]](史記)에도 비슷한 기술이 있어, 공자가 [[노나라]](魯)의 역사서인 원본 춘추에 자신의 글을 첨가하여 춘추를 지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전한시대 춘추학에서는 오로지 춘추에서 공자의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근거하는 공양학이 융성하였다.
신나라를 거처 후한(後漢)이 건국된 이후에 공자를 주공(周公)의 조술자(祖述者)로 하는 고문학이 융성하였고, 춘추좌씨전에 을 그 것을 해석하는 학문이 나타났다. 춘추를 주공의 전통을 계승했던 노나라의 사관이 쓴 노나라의 사기를 그 자체를 보고는 공자는 말하였지만 적지 않았다는 것을 조술했다고 하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되었다.
당나라 시대가 되자 유지기(劉知幾)의 사통(史通)으로 시작으로 춘추를 의심하는 주장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북송의 왕안석(王安石)은 춘추의 내용은 공자의 숨은 의미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단순한 문장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공자의 숨겨진 의미를 찾겠다면서 계속되었다.
청나라 시대가 되자 상주학파(常州學派)가 다시 한나라 시대의 공양학을 연구하여 춘추를 포함한 육경을 편집자로서 공자가 창작한 것으로 하였다.
그 후, 근대가 되어서 [[고사변]](古史辯)을 주로 삼는 의고파(擬古派)가 나타나자 공자와 춘추의 관계를 완전하게 부정했다.현재는 공자의 저작이라는 강력한 주장은 없지만 어떠한 관계를 인정하는 것과 완전히 관계없다고 하는 것등 두가지 의견이 있다.
 
== 춘추주석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