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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책임 추궁 ====
[[파일:LWY.jpg|thumb|180px|left|내각 총리대신 [[이완용]]<br>(그는 [[헤이그 밀사 사건]]에 대한 일본측의 추궁에, 고종의 퇴진으로 사건을 종결지으려다 매국노의 원흉으로 낙인찍혔다.)]]
 
[[7월 3일]] 이토는 총리대신 이완용을 통감 관저로 불러 어디서 입수했는지 고종의 밀사를 통해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호소 친서의 초고라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면서<ref name="yun251">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51페이지</ref> 이완용을 추궁했다. 이완용은 한때 친[[러시아]]파 인물이라 의심받고 있었다. 이토는 이완용에게 "이같은 행위는 보호조약을 위반한 것이며 일본에 대한 적대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협박했다.<ref name="yun251"/>
 
[[파일:LWY.jpg|thumb|180px|left|내각 총리대신 [[이완용]]<br>(그는 [[헤이그 밀사 사건]]에 대한 일본측의 추궁에, 고종의 퇴진으로 사건을 종결지으려다 매국노의 원흉으로 낙인찍혔다.)]]
 
[[파일:Gojong.jpg|thumb|210px|right|[[대한제국 고종|고종 황제]]<br>([[일본]]정부와 [[이토 히로부미]]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오자 이완용은 고종의 퇴진이 왕실과 국민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파일:Emperor Sunjong.jpg|220px|thumb|right|순종]]
{{참고|이재명 의거}}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자 그는 사회적으로 황제를 퇴위시킨 망국노, 역적이라는 질타를 당했고 반이완용 시위, 이완용 화형식이 곳곳에서 거행되었다. [[1907년]] [[12월]] 보국숭록대부로 승진했다. 이완용은 1909년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가하러 [[명동성당]]에 갔을 때 기다리던 [[이재명 (1890년)|이재명]]<ref>이재명은 당시 대한제국의 현역 군인이었다.</ref>의 칼에 찔렸다. 그러나 우연히 인력거꾼 박원문이 그의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목숨을 건진다. 박원문은 대신 부상을 당해 절명하고 만다. 이재명 열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그 자리에서 재차 이완용을 공격했지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 하고 체포된다. 이재명 열사는 합병 후 박원문을 살해한 죄로 1910년 9월 교수형에 처해졌다.